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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지식인의 죽음? 우리 할 일은 그가 남긴 ‘문장의 숲’ 거니는 일뿐

황태자의 사색 2022. 3. 27.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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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지식인의 죽음? 우리 할 일은 그가 남긴 ‘문장의 숲’ 거니는 일뿐

[아무튼, 주말] [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롤랑바르트 ‘저자의 죽음’과
’多作' 작가 이어령의 부고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22.03.26 03:00
 
 
 
 
 
네덜란드 화가 얀 에클스 주니어(1759~1793)의 회화 '펜을 다듬는 작가'(1784).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까? (···) 발자크가 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말하고 있는 걸까? 여성에 대한 일정한 철학과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는 발자크라는 개인이 말하고 있는 걸까? 여성성에 대한 어떤 ‘문학적’ 사상을 토로하고 있는 저자 발자크가 말하고 있는 걸까? 보편적인 지혜가 말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낭만적인 심리가 말하고 있는 걸까?” -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중에서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의 소설 <사라진느>에는 거세한 남자가 여자로 변장한 일에 대한 묘사가 있다. “그는 여자였다. 갑작스러운 두려움, 불합리한 변덕, 본능적인 두려움, 이유 없는 허세, 대담하면서도 섬세한 감정을 가진 여자였다.” 바로 이 문장을 두고,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도대체 누가 저 문장을 말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바르트의 유명한 산문 ‘저자의 죽음’ 도입부다.

도대체 누가 저 문장을 말하고 있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소설가 발자크가 자기 생각을 쓴 것이고, 따라서 저 문장과 저 문장에 담긴 생각은 온전히 발자크의 것이고, 따라서 그가 원고료를 고스란히 가져갔을 것이고, 그래서 발자크가 천재라고 불리기도 하고, 왜곡된 여성관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하는 것인데. 저 작품으로 인한 영욕은 모두 발자크의 것일 텐데.

만약 발자크가 진정 자신이 쓴 작품과 그에 담긴 의미의 온전한 주인이라면, 발자크가 죽기 전에 작품 해설을 빠짐없이 받아 놓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어떤 것이 맞는 해석인지 결정해줄 유일하고도 확실한 권위자는 다름 아닌 저자 자신일 테니까. 저자가 죽어 버리고 나면, 정답을 말해 줄 사람이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일 테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한국 고등학생들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이른바 수능 시험 문제에 어려운 시가 한 편 출제된다. 이제 수험생들은 사지선다로 제공된 답 중에서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시험 뒤 발표된 정답이 그만 학원에서 가르치던 정답과 다르지 뭔가! 말도 안돼! 청와대에 국민 청원이라도 해야 하나! 이 난리통에서 어느 총명한 학생이 아이디어를 낸다. 바로 그 시를 지은 시인에게 정답을 물어보는 것이다. 문의를 받은 시인은 엄숙하게 선언한다. 그 문제의 정답은 바로 이거다! 이 소동은 작품의 의미를 확정할 권위자는 저자에게 있다는 생각에 기초해 있다.

이것이 어디 수능 시험만의 일이랴. 고등학교 시절, 나는 입시 공부가 지겨워, 시립 도서관 회의실을 빌려 운영되던 독서 클럽에 나갔다. 동기 부여가 되는 일은 잘하고,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 일은 죽어도 하기 싫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입시가 싫었던 내게, 그 독서 클럽에서 읽고 토론한 책들은 입시용 도서보다 백배는 더 재밌었다.

그 독서 클럽 멤버들이 읽고 토론한 책 중에 이어령이 쓴 <장군의 수염>이라는 소설도 있었다. 우리들의 토론은 대개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으니 평화롭게 지내자는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혈기 넘치는 고등학생들의 토론답게 대부분 격론으로 흘렀다. 그러다가 모두가 동의할 만한 결론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끝내 일정한 결론에 합의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장군의 수염> 토론도 그랬다.

 

세월이 지나, 이제 <장군의 수염> 내용은 잊었지만, 지금도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장군의 수염> 토론 과정에서 끝내 소수 의견을 견지하던 학생이 있었다. 끝내 다른 학생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그 학생은, 그다음 주 모임에 다시 나타나서 의기양양하게 외쳤던 것이다. 내가 이어령씨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았더니, 내 해석이 맞대! 저자 본인 입으로 그랬어!

그 학생이 과연 우리가 했던 토론 내용을 객관적으로 이어령에게 전달했을까. 혹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토론을 재구성해서 전달하지나 않았을까. 저자 이어령은 그 전달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을까.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온 어린 학생에게 친절을 베푼 데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가능성들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그 학생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당혹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가 토론 끝에 일정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들, 그것이 저자의 의도와 다르면 그 결론은 타당한 것일까. 토론에서 자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저자의 의견을 묻는 일은 정당한 것일까. 저자의 의견이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면, 토론은 해서 뭐 하는 것일까 등등.

독서 클럽에서 탕진한 고등학교 시절도 어느덧 끝났다. 다행히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텍스트를 다루는 다양한 시각들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는 인간이 자기 생각의 온전한 주인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었고, 아무리 걸출한 지식인이라 해도 시대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견해도 있었고, 의미는 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독자가 만드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고, 의미는 텍스트 내부에 있다는 견해도 있었고, 큰 의미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맥락 안에 있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한 견해들을 참고하며 책을 읽던 어느 날, 그 옛날 학생의 전화를 받아주던 이어령 선생만큼이나 나이가 들게 된 어느 날, 언론에 이어령 선생의 부고가 났다. 이어령의 죽음. 사람에 따라 이 죽음은 학자의 죽음이기도 하고, 천재 지식인의 죽음이기도 하고, 지식 엔터테이너의 죽음이기도 하고, 타협적인 전직 관료의 죽음이기도 하고, 또 현자의 죽음이기도 하겠지만, 다작으로 유명한 저자의 죽음이라는 데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어령은 천재적인 저자였을까? 이어령 선생이 진정 뛰어난 저자였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천재적 저자라는 관념 자체가 내 마음속에서 죽은 지 오래다. 저자들은 대개 부실한 전두엽을 부여잡고 자기 기만과 한심함과 우스꽝스러움과 불행과 그리고 행운과 싸우다가 결국 문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남긴다. ‘저자’가 죽은 뒤, 아직도 살아있는 이가 할 일은 죽은 저자를 매개로 하여 이 세상에 떠돌게 된 문장 속을 거니는 일일 뿐. 문장의 숲을 거닐면서 인간의 조건을 반추하는 일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