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아무튼, 주말] 밥만 짓는 삶 싫었던 17세 소녀… 박정희 대통령 휘장 수놓는 명장으로

황태자의 사색 2022. 3. 27. 21:03
728x90

[아무튼, 주말] 밥만 짓는 삶 싫었던 17세 소녀… 박정희 대통령 휘장 수놓는 명장으로

최윤희 전 합참의장 장모
최유현 명장의 70년 자수史

입력 2022.03.26 03:00
 
 
 
 
 

흰 가림천을 걷어내자 소나무를 오르는 호랑이가 드러났다. 호랑이 꼬리를 내려다보는 까치 두 마리 표정이 익살맞다. 최유현(86) 자수장이 작업 중인 <까치와 호랑이> 작품이다. 붓이었다면 한 획에 그을 선도, 한 오라기 비단 실로는 수십 겹을 쌓아야 한다. 평생 함께 호흡해 온 실과 먼지 때문이었을까. 최 자수장은 약해진 기관지 탓에 한번 기침이 시작되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하지만 작업실 수놓는 틀 앞에 앉고 나서부터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뚝’하고 바탕천을 뚫는 바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국가무형문화재 80호로 지정된 최 자수장은 1936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를 따라 바느질을 시작했다가 자수 대가 권수산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민화와 탱화 걸작을 남긴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1970년대부터 그는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혼을 담아 2년에서 길게는 10년에 걸쳐 완성되는 작품을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해군 최초로 합동참모본부를 이끈 최윤희(왼쪽) 전 합참의장과 최유현 자수장.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최 자수장을 만난 건 지난 14일 부산전통예술관에서였다. 그의 손을 꼭 잡고 선 중년 남성은 다름 아닌 38대 합동참모본부를 이끈 최윤희(68) 전 합참의장이었다. 최 자수장의 사위다. 현재 그는 대한민국해양연맹에서 총재를 맡고 있다. “제가 오늘 우리 ‘엄마’ 모시고 의전장교 역할 하려고 같이 나왔습니다. 현역으로 있을 땐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뵙지도 못했죠. 어떤 인생 살아오셨는지 들어볼 기회다 싶어 함께 왔습니다.”

◇여자로 태어나 밥만 하며 살 순 없었다

-사위와 손을 꼭 잡은 모습이 다정해 보입니다. 두 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시는지요.

“당시 해군 중위였는데, 딸과 결혼하겠다고 찾아온 모습을 보자마자 단박에 ‘사윗감이다’ 생각했죠. 군인이었던 내 남편은 딸까지 군인 남편 만나 고생시키지 않겠다며 극구 반대했는데, 내가 나서서 성사시켰어요.”

-요즘은 무얼 하며 지내십니까.

“부산대 한국전통복식연구소 원장직을 작년에 내려놓았어요. 젊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지, 더 한다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부산 금정구에 있는 개인 작업실에서 이수자 교육을 하고 있는데, 스무 명 제자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보니 코로나가 퍼진 이후에는 그마저도 못 하고 있어요. 대신 개인 작업에 몰두합니다. 오는 5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생의 찬미’ 전시회에 출품하고, 내년 10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처음 자수의 길에 들어선 건 무엇 때문이었는지요.

“내가 10대였던 1940년대는 ‘바느질을 해야 시집갈 수 있던 시대’였죠. 옷을 산다는 개념이 없고, 옷감을 떼어다 옷을 지어 입던 시절이었으니까. 빨래를 하려면 옷감을 다 해체한 뒤 빨았다가 다시 바느질을 했어요. 어머니 따라 자연스럽게 바느질을 한 거죠.”

작품 '까치와 호랑이' 수를 놓고 있는 최유현 자수장.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본격적으로 자수에 빠진 건 언제였나요.

“6·25전쟁 통에 학교가 전부 문을 닫았을 때, 자수 대가 권수산 선생님이 세운 ‘목포가정여숙’에 다니게 됐어요. 목욕탕 건물 2층을 개조해 여학생 100여 명을 받아준 임시 학교였는데, 양장·자수·편물반으로 나눠 가르침을 받았죠. 권 선생님은 당시 일본 미술 대학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었고, 그를 보며 나도 처음으로 자수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 권 선생을 따라 부산으로 떠나셨더군요. 집안에서 반대하진 않았나요.

“부산 동아대 가정학과에서 권 선생님을 교수로 초빙했죠. 나는 열일곱 살이었는데, ‘대학 공부 시켜준다’는 선생님 말에 홀랑 따라 나선 거예요. 집안에선 시집도 안 간 딸이 객지로 간다며 난리가 났어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인생을 살기는 싫었어요.”

최유현 자수장이 1963년 부산 광복동에 문을 연 자수연구소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 / 최유현 자수장

◇이틀 만에 수놓은 박정희 대통령 휘장

-1960년대에는 이름을 내걸고 수예 학원도 운영하셨던데요.

“부산여상, 동주여중, 혜화여고에서 가정 과목 교사로 10년쯤 일하던 차에, 나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1963년 부산 광복동에 최유현 자수연구소를 열었어요. 혼수 준비반, 직업반, 취미반으로 나눠서 가르쳤는데, 어찌나 학생들이 몰리던지 3부제로 운영할 정도였죠. 당시 최유현 학원 출신이라고 하면 부산 일대에서는 알아줬답니다(웃음).”

 

-전국에서 찾는 분들이 많았겠네요.

“1960년대 울산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국가 공단이 만들어질 때 즈음, 청와대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공단 기공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는데, 봉황이 그려진 휘장을 수놓아줄 수 있겠냐고 묻는 겁니다. 불과 행사 이틀 전이어서 사색이 되어서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지만, 통할 리가 있나요. ‘무조건 하셔야 된다’는 비서 말에 이틀 밤을 꼬박 새워서 완성한 휘장을 전달했지요.”

-그 뒤로 비슷한 요청이 많았습니까.

“대통령 휘장 수놓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자 ‘글로벌’하게 요청이 들어왔죠(웃음). 1967년 독일 뤼브케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했어요. 그때만 해도 국가 원수급이 부산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정부 관계자로부터 국빈 선물용으로 자수 작품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화조도’ ‘어해도’같이 민화를 기반으로 한 내 작품들이 국빈 선물로 전달됐습니다.”

-생애를 통 틀어 ‘최유현 스타일’을 정의한다면요.

“유년기에는 베갯모나 수저집 같은 생활 소품에 수를 놓았어요. 30대엔 민화, 40대 이후에는 불화에 천착했죠. 연도별로 관심 있는 주제는 있었지만 표현 방식에는 파격을 주려고 노력했어요. 실 대신 머리카락으로 수를 놓는 모발 자수도 시도해봤고요. 머리카락은 뻣뻣하지만 매끄러워서 섬세한 수를 놓기는 힘들지만 염색실보다 색채와 윤기가 오래 유지돼요. 남들이 봤을 때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의 작품을 만드는 것. 그게 내 자수 스타일입니다.”

작품 '겨울 호반의 원앙'. / 최유현 자수장
까치와 호랑이 작품 앞에 선 최유현 자수장.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몇십억 준대도 작품 못 파는 이유

-완성까지 11년 걸린 ‘팔상도’, 12년이 걸린 ‘삼세불’. 최근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종교였습니다.

“어떤 종교든, ‘믿으라’고 백 마디 말하는 것보다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올 하나의 문이 더 강력하죠. 어쩌면 교리보다 중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종교로 통하는 문의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예술이고요. ”

-하필 탱화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민화를 그리다 보니 교리가 고도로 집약된 탱화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어요. 앞에 서면 압도되고 마는 대형 탱화야말로 예술의 정수입니다. 밑그림을 얻으려고 양산 통도사에 가서 매일 기도를 드렸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팔상도예요. 삼세불은 김천 직지사에서 본 탱화를 바탕으로 만들었죠. 탱화가 까다로운 건 보살이나 부처의 얼굴 때문입니다. 실의 굵기와 색, 0.01mm만 미묘하게 달라져도 인상이 달라지니까요.”

-오직 불교 작품에만 천착합니까.

“탱화 작품이 많지만, 그렇다고 나를 불화 작가로만 보지는 말아줬으면 해요. 주제에 한정을 두는 건 스스로 폭을 좁히는 일입니다. 내 작품 중에는 예수의 고난을 보여주는 ‘십자고상도’와 천주교 사제들이 입는 의복 ‘영대’에 수를 놓은 것도 있어요. 자수를 통해 다양한 종교의 ‘믿음’에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요.”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는 '팔금강도' 8폭 병풍 중 '자현금강'을 바탕으로 최유현 자수장이 만든 작품 / 최유현 자수장

-어떤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십니까.

“보는 사람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명주실과 비단실 염색도 직접 하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독창적인 기법을 시도하죠. 몇십억 원을 준대도 작품을 팔 수 없는 이유죠.”

-앞으로의 소망이 있는지요.

“전통 자수의 맥을 이어 나가는 것. 전통 자수는 중국이나 동남아 공장 생산에 밀려 도태되고 있어요. 값싸고 빠른 것만 추구하다 보니 자수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더 늦기 전에 전통 자수를 지킬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최윤희 전 의장은 부산전통예술관에 전시된 최유현 자수장의 ‘백접도(百蝶圖)’ 작품 앞에 섰다. 가로 210cm, 세로 55cm 크기의 대형 작품으로, 생태도감처럼 섬세하게 나비 문양이 표현됐다. 최 전 의장이 “작품 속 나비가 총 100마리 맞습니까”라고 묻자 최 자수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103마리야.” 왜냐고 되묻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그냥”. 온 힘을 쏟아붓고 모든 게 끝났다 생각하는 순간에 ‘그냥’ 한 걸음 더 가는 것. 그것이 최유현 자수장이 70년 동안 쌓아온 자수 스타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