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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에 먹칠하는 사람들

황태자의 사색 2022. 3. 2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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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에 먹칠하는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2022.03.28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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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기자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구독

지난 26일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순국 112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뉴스1]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어린 시절 별명은 ‘전구(電口)’다. 풀어쓰면 ‘번개 입’이다. 바른 소리를 잘해 친구들이 붙여줬다. 타고난 성질이 급해 부모님은 ‘중근(重根)’이라 이름 지었다. 좀 진중해지라는 뜻이다. 친구와 술을 좋아한 중근은 1905년 12월 술을 끊겠다고 다짐한다. “대한민국이 독립하는 날까지 술자리를 열지 않겠다”고 했다.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안 의사 서거 112주기, 신구권력 충돌
눈앞의 이익만 내세우는 ‘졸장부들’
“불화·오만은 만악의 뿌리” 되새겨야

 『안응칠 역사』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은 일본 포로를 풀어주는 장면이다. 독립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1908년 6월 함경북도에서 사로잡은 일본 군인·상인들을 놓아줬다. 일본인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농간 때문에 귀중한 생명을 살육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통곡하자 안 의사는 “동족과 이웃 나라 간에 이유 없는 전쟁을 일으킨 이들을 쫓아가 없애라”며 총포까지 돌려주었다.
 독립군 장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있는 힘을 다해 잡은 적을 풀어준다면 우리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도 야만적인 행동을 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거하고, 인(仁)으로 악에 대적한다’는 뜻이니, 여러분은 부디 여러 말 마시오.” 2년 뒤 뤼순(旅順)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의 큰 뜻이다.
 지난 토요일(26일)은 안 의사 서거 112주기를 맞는 날이었다. 때마침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안 의사가 처형 직전까지 가슴에 품고 있던 가족사진첩을 보존 처리한다는 뉴스였다. 부인 김아려 여사와 분도·준생 두 아들이 함께한 빛바랜 사진으로, 통역을 맡은 소노키 스에요시가 비단에 사진을 붙여 안 의사에게 건넨 것이다. 안 의사 사후 일본에 건너간 사진은 2020년 초 일본 소장자가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했다.
 『안응칠 역사』 『동양평화론』 정본 발간을 지휘한 안재원 서울대 교수는 “안중근은 살아 있다”고 단언한다. 특히 ‘인으로 악에 대적하라’는 안 의사의 ‘명령’을 주목한다. 각기 국민을 앞세워 상대방을 혐오하는 진영논리, 소위 배제주의적 정의관이 득세한 우리 사회에서 안 의사는 계속 소환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정치판에 소환된 안중근은 ‘일그러진 영웅’ 비슷하게 추락한 모양새다. 지난 대선 기간에 더욱 그랬다. 각 후보는 상대를 폄훼하는 수단으로 툭하면 안 의사를 끌어들였다. 여야 후보·실력자 간에 “이완용이 안중근을 매국노라 하는 것” 식의 험담이 오갔다. 이재명 후보, 조국 전 법무장관을 안중근에 빗댄 경우도 있었다. “안 의사의 거룩한 유지를 받들겠다”며 후보 단일화 결렬을 선언한 안철수 후보는 얼마 뒤 바로 자기 말을 뒤집었다. 윤석열 당선인은 예비후보 시절 안 의사 영정에 술잔을 올리며 ‘윤봉길 의사의 깊은 뜻 담아’라는 설명을 단 SNS 사진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지난 26일 열린 안 의사 112주기 추모식에 유튜브로 참여했다. 행사 끝머리, 사회자의 간곡한 부탁에 100% 공감한다. “정치적 목적으로 안 의사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 안 의사의 숭고한 위국헌신 정신에 먹칠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추도식 무대 양쪽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당선인이 보낸 조화가 놓여 있었다. 안 의사가 반가워했을까. 대선 이후에도 분열과 충돌을 거듭하는, 아니 되레 깊어지는 신구 권력의 대립이 볼썽사납다. ‘대장부 안 의사’는 사라지고 ‘졸장부’만 활개 치는 꼴이다.
 안 의사가 1908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 해조신문에 기고한 글, 일명 ‘인심결합론’을 인용한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불합병(不合病·불화) 때문이다. 불합병의 근원은 교오병(驕傲病·교만)이다. 교만은 만악의 뿌리다. 교만을 바로잡는 것은 겸손이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공경하라.” 오늘 대선 이후 19일 만에 만나는 문재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이 과연 협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박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