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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담배·도박...약세장에선 너의 죄를 사하노라

황태자의 사색 2022. 4. 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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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담배·도박...약세장에선 너의 죄를 사하노라

[WEEKLY BIZ] 꿋꿋하게 버티는 죄악株

입력 2022.03.31 17:30
 
 
 
 
 
일러스트=김영석

지난달 중순 미국 나스닥 지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금리 인상 공포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고점 대비 20% 이상 하락하는 베어마켓(약세장)에 진입했다. 나스닥이 베어마켓에 진입한 것은 2020년 3월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이 전 세계를 덮친 이후 처음이었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시장의 예상대로 기준 금리를 0.25%만 올리고, 전쟁 공포가 어느 정도 잦아들면서 지수가 반등하고 있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꿋꿋하게 약세장을 버텨낸 종목들이 있다. 바로 술·담배·도박 등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장 기업을 뜻하는 ‘죄악주(sin stocks)’다. 나스닥이 작년 11월 고점 대비 지난달 중순까지 21.6% 하락하는 동안 죄악주를 모아놓은 ETF(상장지수펀드)인 ‘어드바이저셰어스 바이스 ETF(VICE)’는 2.5% 내리는 데 그쳤다. 팬데믹 이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 열풍이 불면서 죄악주들은 펀드 매니저는 물론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아왔다. 그러나 시장이 흔들리자 경기와 상관없이 꾸준한 실적을 유지하는 죄악주로 관심을 돌리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른바 죄악주는 시장이 성장주에서 가치주로 순환하는 과정에서 수혜주로서 계속 빛을 발할 것”이라고 했다.

◇경기 침체에도 수요 굳건

영국 투자 플랫폼 인터랙티브 인베스터에 따르면 담배 회사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BAT)와 임피리얼 브랜즈는 올 들어 개인 투자자들이 많이 사들인 주식 29위와 32위에 올랐다. 지난해에는 각각 44위, 40위였다. 지난 1년간 BAT와 임피리얼 브랜즈 주가는 각 19.2%, 15% 오르며 영국 대표 지수인 FTSE100 상승률(10.7%)을 가뿐히 앞질렀다. 국내에서도 죄악주로 분류되는 주식들의 성과가 좋았다. 올 들어 코스피 지수는 9.6% 하락했는데, 주류 회사 하이트진로(23.1%), 카지노 회사 강원랜드(12%), 담배 회사 KT&G(2.3%)는 상승세를 나타냈다.

담배와 술, 도박 회사는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중독성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 때문에 ESG 펀드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 같은 특성이 오히려 경기 침체기에 죄악주를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만든다고 분석한다. 자산운용사 퀼터체비엇의 크리스 베킷 리서치 수석은 “시장이 불확실할 때 죄악주가 더 잘 견디는 편”이라며 “경기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산업에 비해 예측이 쉽다”고 했다. 자산운용사 GDIM의 톰 스파크 투자 매니저도 “죄악주의 수요는 인플레이션 상승기에도 꺾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주류업체들은 팬데믹 완화로 오락과 레저 활동이 늘면서 매출 상승도 기대해봄 직하다”고 했다.

죄악주가 역사적으로 시장 대비 좋은 성과를 냈다는 연구도 여럿 있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 연구에 따르면 1900~2019년까지 120년간 미국 주식이 연평균 9.6% 상승하는 동안, 미국 담배 회사 주식은 14.2%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경우 전체 주식 시장이 연평균 9.3% 상승할 동안, 영국 주류 회사 주식은 11.5% 성장했다. 프랭크 파보치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21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1970~2007년 도박 회사는 연평균 시장보다 26.4%포인트 높은 초과 수익률을 거뒀고, 담배(14.7%포인트), 무기(24.6%포인트), 성인 서비스(10%포인트), 주류(5.3%포인트) 회사도 높은 수익률을 거뒀다.

 

파보치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죄악주가 일반적으로 투자자들의 선호도가 낮아 저평가돼 있기 때문에 다른 주식에 비해 상승 여력이 크다”며 “다른 독과점 사업에 비해 가격 측면에서 규제가 적어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이 밖에 기업에 요구되는 사회적 표준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므로, 이와 관련된 사업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도 부수적인 이유로 꼽았다.

◇높은 배당 수익도 매력

죄악주 기업은 투자 비용이 적고 현금 흐름이 안정적이기 때문에 대체로 높은 배당을 준다. FTSE100의 평균 배당 수익률은 3.5%인데, BAT와 임피리얼 브랜즈는 각 6.8%, 8.7%라는 높은 배당 수익률을 자랑한다. 스파크 매니저는 “죄악주의 매력적인 배당금은 금리 인상기에 투자자들에게 유용할 수 있다”고 했다. 저금리 상황에선 당장 수익이 많지 않아도 미래 성장성이 있는 기업들의 주가가 오르지만, 금리가 오르면 변동성 장세 속에서도 현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배당주의 매력이 높아진다.

작년 연말에는 죄악주에 투자하는 새로운 ETF가 등장하기도 했다. 미국 자산운용사 배드인베스트먼트는 작년 12월 ‘B.A.D ETF(BAD)’를 뉴욕 증시에 출시했다. BAD는 주류, 대마초, 스포츠 베팅, 카지노 등 대표적인 죄악주 회사에 투자한다. 토미 맨쿠소 배드인베스트먼트 대표는 블룸버그에 “좋은 투자인지를 결정할 때 ‘사회적 낙인’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투자 세계에선 외면받고 있지만, 일상 생활에선 널리 받아들여지는 산업에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죄악주에 투자할 때 잠재적인 규제나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말보로를 주력 상품으로 판매하는 미국 담배 회사 알트리아 그룹은 2018년 액상형 전자담배 ‘쥴(juul)’을 생산하는 쥴 랩스를 인수했다가, 건강 문제로 쥴 판매가 금지되면서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봤다. 쥴 랩스 인수 당시 51.4달러였던 알트리아 그룹 주가는 이듬해 쥴 판매 금지 여파로 39% 하락한 31.4달러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ESG 투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죄악주 투자를 철회하는 기관 투자자들이 늘고 있는 것도 불안 요소 중 하나다. 영국 연금 회사인 스코티시위도우는 최근 담배 제조업체 및 유통업체의 주식과 채권 약 10억파운드(약 1조5979억원) 상당을 전부 매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스코티시위도우의 마리아 나자로바 도일 연금투자책임자는 “담배 산업은 투자자와 규제 기관, 소비자로부터 공급망 내에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강력한 압박에 직면하고 있어 리스크가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