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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십 넘어 영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사색 2022. 4. 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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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십 넘어 영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인생의 ○○○]이원덕 우리은행장의 ‘영어 일기’

이원덕 우리은행장
입력 2022.04.06 03:00
 
 
 
 
 
이원덕 우리은행장이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본점 집무실에서 영어 일기장을 펼쳐 보였다. 그는 “10년간 꾸준히 적은 영어 일기장 11권이야말로 내 인생의 스승”이라고 했다. /남강호 기자

초등학교 시절 숙제로만 써본 일기를 오십이 돼서 다시 쓰기 시작했다. 2012년 말 우리은행 자금부장을 하면서 알게 된 지인에게 정말 마음에 드는 좋은 노트를 선물받은 것이 계기였다. 기왕이면 영어로 한번 써보자는 생각을 했다. 국제금융실, 뉴욕지점 등에서 근무할 때 영어 실력 부족을 느꼈던 터였다.

영어 일기는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한동안은 ‘누구와 어디에서 밥을 먹었다’는 식으로 일과를 간단한 문장으로 기록하는 수준에서 못 벗어났다. 그래도 등장하는 인물이나 지명, 상호 등까지 모두 영어로 쓰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꾸준히 썼다. 단순한 영어 문장들의 나열이지만, 일주일에 사흘치 정도는 한 페이지를 꽉 채워 썼다. 노트를 1년 반 만에 다 채웠다.

그 무렵 ‘왜 영어로 일기를 쓰는데 영어 커뮤니케이션에 그다지 발전이 없을까’를 항상 고민했다. 그러던 중 어느 영화에서 미국 학생들이 “소설 ‘제인 에어’(Jane Eyre) 어디 어디에 있는 말”이라며 고전을 인용하는 장면을 보고 해답을 찾았다. 우리가 논어, 맹자 등의 문구를 인용하듯 영미권 사람들도 고전을 읽으며 정신적·철학적 탄탄함을 쌓아 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 바로 ‘제인 에어’를 샀다. 1900년대 초반 소설인 데다 생소한 형용사가 너무 많아 사전을 찾아가며 몇 달에 걸쳐 참 어렵게 읽어냈다. 좋은 문구는 일기장에 옮겨 적었다.

일상만 적던 건조한 내 일기의 소재가 풍부해지기 시작함을 느꼈다. ‘저녁 식사 모임 참석자들의 인품이 정말 훌륭했다’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했는데, 그건 적절하지 않았다’ 같이 느낀 점과 자기반성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간 읽으며 밑줄을 치거나 적어두었던 소설과 고전의 멋진 영문 표현을 빌려서 나 자신이나 사회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영어 일기는 점점 길어졌다.

 

보통 오전 7시쯤 사무실에 나와 잠시 여유가 생길 때 일기장을 편다. 전날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고 저녁 자리에서 만났던 인사들에게 배울 점 등을 적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사무실 창문 밖 남산을 보며 느끼는 계절, 날씨 등도 적는다. 얼마 전부터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책 ‘2차 세계대전’을 읽기 시작했다. 처칠이 기록한 하루하루를 읽으면서 그의 고민과 철학을 배워보려고 한다. 은행장이 된 뒤로는 일기 쓸 시간을 내기가 점점 힘들어져 고민이다.

일기가 일상에서 생각으로, 그리고 고전에 대한 고찰과 내 삶에의 연결로 바뀌어가는 동안 나도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더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됐다. 지난 10년간 쓴 영어 일기장 11권은 내 인생의 스승이다. 하루를 만년필로 천천히 적으며 생각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 하루하루 조금씩 쌓아가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