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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꾼 윤보선… 작명의 주역이 제 아버지랍니다

황태자의 사색 2022. 4. 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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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꾼 윤보선… 작명의 주역이 제 아버지랍니다

[김동규의 나는 꼰대로소이다]

언론인이자 서울역사가 김영상
청와대 작명에 얽힌 이야기

김동규 서울대 신경외과학 명예교수 '마음 놓고 뀌는 방귀' 저자
입력 2022.04.09 03:00
 
 
 
 
 
일러스트= 안병현

깔끔하게 정돈된 호젓한 도로의 중앙 분리대를 따라 줄줄이 늘어선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퍽 정겨웠다. 여름에는 무성하고 짙푸른 나뭇잎만 봐도 마음이 풍성했고, 샛노랗게 물든 가을 단풍과 낙엽 진 나목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꽃은 또 다른 풍경을 연출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6년을 하루처럼 청와대 앞 은행나무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은행나무는 이른 아침 졸린 눈 비비며 등교하는 어린 학생을 웃으며 맞았고, 하굣길에는 힘든 공부로 처진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공연히 마음이 들뜬 따스한 봄날, 청와대 정문 맞은편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좌우에 총을 들고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당시 수도경비사령부의 경비병에게 겁 없이 장난을 걸다가 혼쭐이 났고, 가을에는 친구들과 농익어 떨어진 구린내 나는 은행을 만지작거리다 손과 팔뚝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지금은 청와대 일대가 사람들로 북적거리지만, 오래전… 제3공화국 시절에는 담장 넘어 지체 높으신 ‘나라님’께서 정사를 보시는 삼엄한 곳으로 철모르는 학생에겐 그저 한적하고 운치 있는 통학길일 뿐이었다.

4월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났다. 정권 후반기에 도를 넘는 실정으로 분노한 국민이 분연히 일어섰고 부패 권력의 심장부로 알려진 대통령 관저 ‘경무대(景武臺)’가 온갖 원망을 오롯이 뒤집어썼다. 성난 민심을 달래고 나아가 새 시대가 열렸다는 신호탄을 터트릴 목적으로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은 관저의 이름을 교체하기로 마음먹은 뒤, ‘서울시사(市史)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운영한 서울 역사의 전문가를 호출했다.

영문도 모른 채 급히 불려 간 인사는 대통령의 의중을 듣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경무대는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역사 깊은 이름이고 잘못된 정치가 어찌 관저의 명칭 탓이겠는가 하는 의견을 올렸다. 하지만 대통령의 확고부동한 의지를 확인하고는 숙고 끝에 두 가지 안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나는 ‘화령대(和寧臺)’이고, 또 다른 이름은 ‘청와대’였다. 화령은 태조 이성계가 새 나라의 국호를 정할 때 조선과 함께 후보에 올랐던 이름으로 뜻과 어감이 좋고, 청와대는 관저 지붕을 덮고 있는 전통 유물인 비취빛 청기와를 나타낼 뿐 아니라 미국의 백악관에 비견될 수 있는 ‘블루 하우스’로 영역할 수 있어 국제 감각에 맞는다는 의견을 달았다. 확실한 윤 대통령의 선정 기준을 알 길이 없으나 결국은 청와대가 낙점을 받았다. 이후 대통령 관저 명칭에 대해 국가원수에겐 황제의 빛깔인 황색이 어울린다는 따위의, 이러쿵저러쿵 작은 논란들이 잊을 만하면 등장했는데, 지금까지 청와대라는 이름은 변함이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청와대에 다시금 옛 경무대의 부정적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국민의 사랑을 받기는커녕 무소불위 권력의 대명사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권위적인 기관으로 부지불식간에 인식되고 있었다. 왕조 시대의 구중궁궐같이 일단 청와대에 들어가면 높다란 담과 측근의 장막에 둘러싸여 통치자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소통은 고사하고 대통령이 국민에게서 점점 멀어져 갈 뿐이었다. 더불어 하나같이 대통령을 지낸 분들의 말년이 순탄하지 않아 풍수지리상 터가 세다는 둥 어떻게든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몇 분의 전임 대통령이 집무실 이전의 필요성을 주장했었다.

20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 윤씨 성을 가진 대통령이 되실 분이 단순히 명칭을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을 통째로 옮긴다고 한다. 당선자가 직접 나서 조감도의 이곳저곳을 지휘봉으로 조목조목 짚어가며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고 청와대는 국민에게 돌려드린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아 천도에 버금가는 대역사(大役事)가 아닐 수 없다. 선결해야 할 문제도 있고, 만만치 않은 반대 의견에도 당선자는 뚝심으로 초지일관 밀고 나갈 모양이다. 졸속이다, 여론 수렴이 부족했다, 안보 공백이 염려된다 등의 반대 논리 중에도 일부 수긍할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타파해야 할 제왕적 대통령을 벗어나 국민에게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좋은 뜻인 만큼 집무실 이전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우리나라가 발전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것이 상식이요 순리 아닐까.

60여 년 전 경무대로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뛰어간 분이 다름 아닌 영(永)자, 상(上)자 쓰시는 선친이다. 언론인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부(副)전공으로 서울 역사 연구 발전에도 이바지하셨다. 왠지 쑥스러워서 남에게 말하진 않았어도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들려주신 대통령 관저의 작명에 얽힌 자세한 뒷이야기를 잊지 않고 마음속으로 늘 자랑스럽게 여겼고, 학생 때 매일 낭만적인 은행나무 길을 오가면서도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앞으로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하면 청와대는 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나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겠지. 그래도 지금의 청와대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에는 한참 못 미치지 않겠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청와대가 가졌던 위상이 서서히 잊히지 않을까.” 자식은 마음 한구석에 못내 섭섭한 심정을 금할 수 없는데, 생존해 계셨다면 선친께서는 어떤 느낌이실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