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경제 신뢰도 떨어져 엔화 추락, 장기화 땐 한국 수출 악재
거세지는 엔저, 한·일 경제 시사점
일본 엔화 가치의 하락(엔저)이 심상찮다. 8일 외환시장에서 1달러당 엔화 환율은 124.15엔으로 2015년 이후 약 7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엔저의 표면적인 원인으로 우크라이나 사태가 꼽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2월 말 이후 엔화는 6% 넘게 하락했다. 그런데, 그사이 달러화 강세에 따른 주요국의 통화 가치 하락이 일반적 현상이었음을 고려해도 엔저는 유독 두드러졌다. 주요국 통화 중 엔화가 터키 리라화 다음으로 낙폭이 컸다. 이 때문에 2018년 12월 이후 약 3년 3개월 만에 처음 100엔의 가치가 1000원 밑으로 내려갔다(8일 100엔당 원화 환율은 980원대를 기록).
원·엔 환율도 3년여 만에 900원대
과거 엔화가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갖고 있던, 달러화 못잖은 ‘안전자산’으로서의 지위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프랑스 시중은행 소시에테제네랄의 앨버트 에드워즈 전략가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외환 트레이더들이 이를 악물고 엔화를 팔아치우고 있다(traders get the bit between their teeth)”며 “엔·달러 환율이 1990년 이후 최고치인 150엔까지 오를 수 있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엔저가 이처럼 계속 두드러질 경우 제조업의 수출에서 일본과는 첨예한 경쟁 관계에 있는 한국도 좋을 게 없다.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그만큼 떨어지게 돼서다. 김찬희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엔저가 하반기까지 이어지면 철강·기계·자동차 등의 업종에서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별개로 전문가들은 일본의 경제 상황이 심상찮다고 보고 있다. 일본의 통화 가치 하락은 결국 일본의 통화정책이 미국과 엇나가는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에서 비롯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이 통화정책을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행은 지난달 18일(현지시간)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하고 현 수준의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기로 했다. 미국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어진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 우려로 올해 총 7차례 금리 인상을 예고한 것과 달리, 오히려 일본은 강한 디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하락) 압박 속에 금리 인상의 타이밍을 못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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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의 올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평균 7.2%로 1991년 이후 31년 만에 최고 수준이었다. 미국이 7.5% 올랐고 한국도 3.6% 올랐다. 이에 반해 일본만 0.5% 상승에 그치면서 OECD 평균치를 크게 깎았다. 재계 한 관계자는 “물가가 단기간 너무 치솟는 것도 좋지 않지만 일본의 경우는 90년대의 버블(거품)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 얘기가 나올 만큼 경제가 활력을 잃은 게 최근의 물가 역주행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 내 풀타임 근로자의 평균 월급(잔업 수당 제외)은 지난해 30만7400엔(약 308만원)으로 2013년 이후 8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는 90년대 초반 임금에 비해서도 4% 정도 오르는 데 그친 수치다. 급여가 이처럼 제자리걸음이니 소비도 침체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TV도쿄에 따르면 일본 도쿄 직장인의 평균 점심값은 649엔(약 6450원)으로 미국 뉴욕(15달러, 약 1만8170원)의 3분의 1 수준이다. 그렇다고 엔저에 따른 국가적인 수출 호조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은 지난해 8월부터 7개월 연속 무역수지에서 적자를 기록했는데 올 1월엔 2조2000억엔 적자로 2014년 이후 8년 만에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제조업의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은데, 이 기간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수출에서 과거 같은 엔저 효과를 보기 어렵다. 이러다보니 일본 안팎에선 위기론이 들끓고 있다. JP모건은 “엔저로 일본 소비자들의 구매력은 약화된 반면 자본 도피 우려는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이런 경제 침체에서 드라마틱하게 벗어날 가능성은 현재로선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우선 통화정책 변화로 보조를 맞추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이 계속 나빠지고 있을 만큼 재정 악화 문제에 직면해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게 되면 재정 부담이 한층 커지기 때문에 금리를 올리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일본의 2020년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58%로 11년 전인 2009년(200%)에 비해 급증했다. 아베 신조 내각 때 의도적인 엔저를 통한 경제 활성화(아베노믹스)를 도모했음에도 재정 건전성 강화엔 실패한 결과다.
지속적인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노동력과 생산성 저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킬레스건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1~2020년 일본의 제조업 근로자 평균 연령은 연평균 0.32% 올라 미국(0.08%)보다 고령화 속도가 4배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인구는 2008년 정점을 찍은 이후 줄곧 감소세이고, 2020년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1.33명에 그쳤다. 전규연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일본은 고령자가 많아 코로나19 확진자 수를 줄이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팬데믹 이후 소비 회복이 다른 주요국보다 더딘 분위기가 역력하다”며 “인구 구조상의 문제라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고 분석했다.
일 고령화·저출산 탓 생산성 저하
이 때문에 지금의 엔저가 일본엔 경제적으로 위급한 상황임을 재차 보여주는 신호나 다름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윤석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제적으로 일본경제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한 게 오늘날 엔저의 근본 원인”이라며 “미래에 일본경제에 어떤 혁신이나 변화가 있을 거란 기대감 자체가 떨어진 것”이라고 전했다. 이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는 여전히 환율의 이점을 통해 수출에서 득을 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제품 경쟁력이 있으면 단지 환율로 수출 성패가 좌우되진 않는다”며 “근본적인 구조 개혁에 나서지 않는 한 지금 같은 내리막길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행히 국내 산업계는 이번 엔저에 따른 악영향이 당장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근 원화 가치도 약세인 탓에 가격 경쟁력 면에서 크게 손실까진 되지 않는 데다, 환율 변동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도 과거보다 줄고 있는 추세여서다. 정혜선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세계 주요 수입국의 경기 회복 속도에 따른 수요와 품질 경쟁력 등 가격 외의 요인들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과거보다 커진 반면, 환율 변동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엔저가 장기화되거나 가속화될 경우에 대한 우려는 남아 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엔·달러 환율이 150엔선에 이르게 되면 거의 모든 업종에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며 “반도체도 안심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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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평
지난 2012년 취임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당시 ‘잃어버린 20년’의 장기 경제 불황에서 탈출하겠다며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하는 데 나섰다. 이런 ‘아베노믹스’의 대표적 경기 부양책 중 하나가 ‘엔저’였다. 엔화 가치를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수출 경쟁력을 회복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2020년 8월 아베 내각이 퇴진하고 다시 1년 반가량이 지난 지금, 전문가들의 평가는 좋지 않다. 일본 전문가인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융합일본지역학부·사진)는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결과적으로 일본의 수출 능력은 향상되지 않았고 무역적자가 심화됐다”며 “이는 엔저를 장기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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