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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로든, 응봉산이든 꽃은 사람과 만나야… 행복 피워 전염시키니까

황태자의 사색 2022. 4. 9.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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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로든, 응봉산이든 꽃은 사람과 만나야… 행복 피워 전염시키니까

중앙선데이

입력 2022.04.09 00:02

업데이트 2022.04.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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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인터뷰] 『대한민국 꽃 여행 가이드』 낸 황정희 작가

경기도 강화 고려산에 흐드러진 진달래. 이달, 4월에 절정을 이룬다.[사진 황정희]

화신풍(花信風). 꽃이 핀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바람이 불었다. 투화풍(妬花風). 꽃을 시샘하는 바람도 불었다. 꽃은 흙 속에서, 가지 끝에서 미처 꽃이지 못한 배아(胚芽) 상태에서 얕은 숨을 쉬며 남몰래 준비를 해왔다. 그리고 용케 봄인 줄 알고 피어났다. 이렇게 다른 세상과의 만남은 진득함 속에 이뤄진다.

황정희(55) 여행작가도 진득하게 이 봄을 열어주는 책을 준비해왔다. 여행작가로 나선 지 18년 만이고, 본격적으로 책을 내겠다고 마음먹은 지 7년 만이다.『대한민국 꽃 여행 가이드』(중앙북스)는 30종의 꽃과 그 꽃을 자랑하는 나들이 명소 60곳을 564페이지에 풍성하게 피웠다. 지난 4일, 황 작가를 서울 응봉산에서 만났다. 그는 책 속의 꽃들을 찍은 카메라를 든 채, 화신풍 속 흔들리는 개나리와 마주했다.

윤중로에 몰리는 이유? 벚꽃 아찔해서죠

서울 성동구 응봉산에서 만발한 개나리를 배경으로 산 꼭대기를 응시하고 있는 황정희 작가. 정준희 기자

송나라의 주휘(周煇, 1126~1198)가 화신풍을 일컬어 지난 겨울의 소한(1월 5일)에서부터 곡우(4월 20일)까지 120일간 닷새 간격으로 솔솔 불어대는 바람이라고 했으나, 따뜻한 중국 강남을 두고 한 말이니 우리 상황과 동떨어져 있을 테다. 그래서 화신풍은 꽃 필 때 부는 바람이라고 말하는 이도 더러 있다.

여하튼 화신풍 속 매화가 이미 피었고, 9일부터 3년 만에 개방하는 서울 여의도 윤중로 벚꽃길은 이번 주에 절정을 이룬다. 벚꽃은 우리가 좋아하는 꽃 2위(2019년 갤럽 조사)다. 왜 우리는 교통지옥일 줄 알면서도 경남 진해, 윤중로로 향하는가. 황 작가는 “매화는 우리나라 일부, 남쪽에 나는 반면 벚꽃은 남쪽 제주도에서부터 북쪽 강원도까지 두루 나는 전국구 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팝콘처럼 팡팡 터지는 경쾌함과 볼에 스민 색조 같은 연분홍 화사함, 치렁치렁한 풍성함이 자아내는 매력은 아찔할 정도”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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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양 매화매을의 홍매화. 황정희 작가는 매화를 책 가장 앞에 매화를 넣었다. [사진 황정희]

3월의 꽃 벚꽃. 황정희 작가는 경남 창원 진해, 강원도 강릉 경포호, 경남 하동 십리벚꽃길, 서울 윤중로(사진)·남산둘레길·양재천·서울숲·워커힐산책로를 벚꽃 여행지로 꼽았다. 단일 꽃으로는 가장 많은 여행지다. [사진 황정희]

충남 서산 개심사의 겹벚꽃. 겹복꽃은 4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5월 초에 절정에 달한다. [사진 황정희]

이곳 응봉산에 피는 개나리에 대해 황 작가는 “소박하고도 순박한 웃음을 피우는 꽃”이라고 설명했다. 친구끼리 온 50대 아줌마들도, 혼자 셀카를 찍는 40대 아저씨도, 수업 끝난 뒤 찾아온 대학생들도 개나리 웃음을 피우고 있었다. 황 작가도 웃으며 “꽃은 땅이 아니라 마음 속에 피는데,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말했다.

꽃은 마음속에 핀다니.
“서울에 이런 개나리 숲이 있다. 올라와서, 아니면 몇 발자국 떨어져서 봐도 좋다. 꽃은 시간이 돼서, 자연 순리에 따라, 제 몸을 보여준다. 꽃이 술렁이면 사람도 술렁인다. 착한 전염이고, 유쾌한 중독이다. 제 몸 피우는 것을 넘어 행복을 피운다. 사진기자도 말하지 않았나. 데이트 오고 싶다고(웃음). 그게 바로 행복이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전북 고창 문수사 단풍을 보러 온 할머니 두 분이 “너무 잘 봤습니다”라며 절을 했다. 지팡이에 의지하는 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 행복을 좀 더 쥐고 싶은 가냘픈 한숨도 작가는 감지한다. 꽃이 내뿜는 강한 전염력은, 삶에의 의지로도 발현되는 것이다.

설악산 천불동계곡의 단풍. 단풍은 10월의 꽃이다. [사진 황정희]

한라산 상고대. 수증기가 나무에 들러붙어 꽃을 만들었다. 황정희 작가는 1월의 꽃으로 '눈꽃'을 꼽으며 한라산을 그 여행지로 내세웠다.[사진 황정희]

그런데 단풍이 꽃인가. 황 작가는 다시 강조했다. “꽃은 마음속에 핀다”고. 물리적으로 꽃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꽃이라는 말이다. 책에는 보통 알고 있는 꽃과는 거리가 있을법한 억새·갈대도 언급한다. 더더욱 식물학적으로는 꽃이 아닌 눈꽃도 다룬다. 작가는 눈꽃을 ‘겨울의 선물’로 제목 지었다. 산수국의 경우에는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제목을 붙였다.

제주 사려니숲에 핀 7월의 꽃 산수국. 산수국에 대해 황정희 작가는 '알쏭달쏭,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책에 적고 있다. 자라는 땅에 따라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 황정희]

30종의 꽃마다 제목을 달았다.  
“산수국은 자라는 토양에 따라 꽃 색이 달라지니, 사람도 자라는 토대가 어떤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나. 꽃은 관심을 갖고 보면 특징을 드러내고, 글과 제목도 안겨준다.”

황 작가는 돌변도 아니고 ‘격변’해서 꽃을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좀 산다고 싶었는데, 외환위기 때 남편 사업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요즘처럼 ‘있어서’ 간 게 아니라, ‘없어서’ 제주로 내려갔다. 연고도 없었다. 기울어진 형편을 조금이라도 세우려고 나섰다. 디자인회사에서 잡지 만드는 일을 했다. 그렇게 제주에서 여행 작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기획, 취재, 기사 작성, 교열까지 도맡았다.

황정희 작가는 20여 년 전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가 그곳에서 여행작가로 나섰다. 제주 가시리 녹산로는 유채꽃과 벚꽃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여행지다. [사진 황정희]

전남 담양 명옥헌월림 배롱나무. 배롱나무꽃은 8월의 꽃이다. 남쪽에서는 잘 자라지만 중부지방에서는 꽃이 약판 편이다. [사진 황정희]

동백·매화·해국, 험난함 이겨내 애착

제주에서 꽃을 만났나.
“오름 수십 곳에 올랐다. 어디선가 오는 허기를 달래줄 무엇인가를 찾았던 것 같다. 꽃이 눈에 들어왔다. 대중에게 꽃을 알려주고 싶었다.”

전남 완도 청산도의 유채꽃은 4월의 꽃이다. 꽃이 진 뒤 길게 맺힌 열매 안의 씨앗을 짜서 기름을 얻는다. [사진 황정희]

꽃무릇 여행지로는 전남 영광 불갑사(사진)와 전북 고창 선운사가 손꼽힌다. 황정희 작가는 '남부에서 9월 10일경부터 피기 시작, 9월 20일경이 절정'이라며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황정희]

충남 서산 유기방가옥의 수선화는 4월에 절정을 이룬다. 추사 김정희는 이곳에 대해 '노란 구름이 질펀하게 깔렸다'고 표현했다. [사진 황정희]

책 제목에 ‘가이드’를 붙였다. ‘이 책을 보는 법’이라는 안내까지 곁들일 정도로 방대하다. 30종의 꽃을 계절별로, 다시 월별로 나눴다. 어른과 함께, 아이와 함께 등 테마별로 엮기도 했다. 책은 이름 유래, 도감, 주변 관광지, 먹을거리, 포토 포인트까지 촘촘히 드러낸다. 이 꽃들을 관통하는 줄기는 여행이다.

꽃 여행 책이라면 보통 그 무대가 산이나 사찰 쪽일 텐데 꽃 박람회도 언급했다.
“꽃은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야생화가 매력이 있지만, 전문적 분야에 상당히 기울어 있다. 고려산·선운사이든, 윤중로·튤립박람회든 꽃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사람은 꽃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서로 행복해진다. 대중적인 여행지와 꽃을 보는 시선을 연결해서 책을 내고 싶었다. 나는 대중적 작가다.”
여행 중에 사람들에게 꽃에 대해 알려줄 때도 있을 텐데.
“물론 있지만 길어도 딱 1분만. 설명은 길면 안 된다. 기껏 꽃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인데, 지나친 설명은 그 의욕을 되레 꺾을 수 있다.”

『대한민국 꽃 여행 가이드』 표지. 경남 창원 진해의 벚꽃축제 장면이다. 화정희 작가는 출판사와 표지 선정을 두고 '가장 화사한 것으로 하자'고 협의했다고 한다. [사진 중앙북스]

책의 출간일은 공교롭게도 4월 5일, 식목일이다. 책 표지에는 경남 창원 진해 벚꽃의 화려함이 묻어난다. 벚꽃 밑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그 기차는 벚꽃을 두드러지게 하려는지, 무엇인가 가리려는지 궁금하게도 윗부분만 보인다.

식목일에 책을 내고, 책 표지에 기차를 살짝만 보이게 한 건 의도가 있나.
“의도야 있지만, 영업비밀(웃음).”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계절은 봄부터 시작하는 걸까. 책도 3월, 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다. 황 작가는 “사람들은 보통 봄에야 꽃 소식을 접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라면서도 “꽃은 사실 겨울에도 복수초·동백 등이 피고, 심지어 눈꽃까지 있다. 꽃은 1년 내내 핀다”고 밝혔다.

2월의 꽃 동백. 황정희 작가는 경남 거제 지심도를 동백 여행지로 꼽았다. [사진 황정희]

애착이 가는 꽃은 따로 있을까. 황 작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굳이 뽑으라면 겨울을 뚫고 나온 동백과 매화, 그리고 바닷가 바위틈에 피는 해국”이라고 밝혔다. 험난함을 이기고 세상과 만나는 꽃들이다. 자신을 꽃으로 이끌게 한 20여 년 전의 험난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추암해변 해국. 10월에 바위틈을 뚫고 나오는 해국은 황정희 작가가 애착이 가는 꽃이라고 꼽았다. [사진 황희정 중앙북스]

3월의 꽃 개나리가 4월의 바람에 4개의 꽃잎을 흔든다. 꽃들은 예년보다 1주일 늦게 세상과 만나고 있다. 투화풍 불자 대청 밑에 한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늦게 왔지만, 봄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상촌 신흠(1566~1628)은 “천지만물 가운데 봄이 으뜸이다”라고 했다. 화신풍이 슬금슬금 가벼워진 소매 안으로 불어온다. 처마 끝 목련이 흔들린다. 나태주 시인이 그랬던가. ‘봄이다, 살아보자’고. 꽃이다, 살아보자.

김홍준기자rimr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