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아무튼, 주말] 경쟁할 것인가, 말 것인가

황태자의 사색 2022. 4. 16. 08:46
728x90

[아무튼, 주말] 경쟁할 것인가, 말 것인가

[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송나라 문인 소식의 ‘적벽부’
”내 것 아니면 취하지 마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22.04.16 03:00
 
 
 
 
 

“무릇 천지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다.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안 된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속의 밝은 달은 귀가 취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마주하면 풍경이 된다. 그것들은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고갈되지 않는 창고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바이다(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子之所共適).” -소식(蘇軾) ‘적벽부(赤壁賦)’ 중에서

러시아 후기 인상파 화가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1862~1945)의 ‘시험 전날 밤’. 의대생 4명이 내일 있을 해부학 시험에 대비해 공부하는 모습을 그렸다. /오르세 미술관

세상에는 경쟁 성애자들이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한없이 자신을 개발하면 사회가 발전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쟁자 없는 식당의 반찬은 자꾸 나빠지곤 하는 것이 사실이다. 상대보다 더 많이 고객을 유치하려는 경쟁이 생길 때 반찬은 좋아지곤 한다. 그 과정에서 고객이 좋은 서비스를 누리게 될 뿐 아니라, 식당도 발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쟁에서 이긴 식당의 관점이다. 그리고 식당에 가서 밥 사 먹을 여력이 있는 사람의 관점이다. 경쟁에서 진 식당의 관점에서도 과연 경쟁이 좋을까. 식당에 가서 밥 사 먹기 어려운 사람에게도 반찬 경쟁이 의미 있는 일일까. 그럴 리가. 경쟁은 경쟁에 참여할 여력이 있는 사람, 그리고 경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게임이다.

그렇다고 경쟁이 아예 없을 수 있을까? 경쟁이 없어지려면, 사람들의 욕구가 없어져야 한다. 아니면, 욕구에 딱 맞는 양의 재화가 안성맞춤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욕망은 욕망을 부른다. 욕망을 줄일 수 있을지언정, 욕망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다. 욕망을 줄였다고 한들, 그 욕망을 채우는 순서는 누가 정할 것인가. 자기가 그 순서를 결정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난다. 욕망은 끝내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현실이 이렇다면, 경쟁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사기에도, 경쟁 없는 사회가 올 거라는 사기에도 속지 말아야 한다. 경쟁이 그리 좋은가. 인생에서 어느 정도 경쟁은 불가피하지만, 경쟁이 심화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경쟁은 곧 고생이기 때문에. 격렬한 사회적 경쟁에 뛰어드는 게 좋겠나, 누워서 뒹굴뒹굴 만화책 보는 게 좋지. 누워 있기는 어디 쉬운 줄 아나. 잘 누워 있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목에 담 온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경쟁자만 늘어나면 결국 사회적 갈등이 온다. 청년층 젠더 갈등이 격화되는 배경에는, 과거보다 많은 이가 한정 자원을 두고 경쟁 중이라는 현실이 있다. 안정된 직장은 줄어드는데 너도나도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주장하니, 경쟁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취업이 어려워지면, 경쟁자를 더 의식하게 되고, 결국에는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자원이라는 파이를 크게 하면 된다. 안정된 직장이 늘어난다면, 경쟁은 아마 완화될 것이다. 그러나 고도성장이 끝난 한국에서 파이는 좀처럼 커지지 않는다. 이제 한정된 파이라도 공정하게 분배해야 한다. 말이 쉽다. 공정에도 심오한 철학과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 성장 배경이 다른 사람들, 조력자의 규모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공정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할 의지와 능력이 없을 때, 기대는 것이 획일적인 시험이다. 학부모는 자원을 자식 교육에 집중하고, 용케 시험에 합격한 자식은 ‘공정하게’ 경쟁자를 제거한 승리자로 탈바꿈한다.

 

11세기 중국의 정치가 왕안석(王安石)도 공무원 시험을 통해 자기 입맛에 맞는 인적 자원을 획일적으로 선발하고, 그렇게 선발된 공무원들의 힘으로 이제껏 정부가 건드리지 못하던 영역까지 뛰어들었다. 과감하게 과세 영역을 늘리고, 방관했던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사회와 경쟁하려 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 어느 때보다도 정부의 존재감이 높아지고, 경쟁적인 분위기가 사회에 조성되었다.

바로 이때, 문인 소식은 왕안석을 비판하는 뜻을 담아 그 유명한 ‘적벽부’를 쓴다. 머나먼 황주(黃州) 땅으로 축출되어 살던 1082년,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무릇 천지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다”라는 말은 아무리 경쟁이 격화되어도, 정부나 타인이 건드릴 수 없는 고유 영역이 있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이 하나의 가치나 기준으로 수렴되는 획일적인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경쟁이 격화되다 보면, 삶의 전 영역을 제로섬 경쟁 원리가 작동하는 곳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다원적인 곳이며, 자원 역시 다원적이다. 세상에는 제로섬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영역도 있지만, 제로섬 경쟁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도 있다.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속의 밝은 달” 같은 것은 전형적으로 제로섬 경쟁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바람을 쐬고 달을 쳐다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소식이 ‘적벽부’를 쓴 지 약 1000년이 지난 2021년 봄,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도 한국 언론과의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적 희소성 개념에 집착하지 말라. 희망, 자신감, 정의 등 비물질적인 가치는 양이 무한하다. 누군가 더 누림에 의해 내 것을 빼앗길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여성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줘도 남성이 누리는 것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더 자유를 누리고 존중을 받는 것을 남성들도 희망했으면 한다.”

희망, 자신감, 정의 등 제로섬적 경쟁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에 눈을 돌릴 수 있으려면, 세상에는 다원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가치들에 자유자재로 눈을 돌리고,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이 필요하다. 경쟁, 아니 경쟁의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이의 확대나 욕망의 제거나 공정한 시험 못지않게 경직되지 않은 마음의 탄력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