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총리,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총리
[아무튼, 주말]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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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독일 총리들의 리더십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책에서 콘라트 아데나워부터 앙겔라 메르켈까지 8명의 총리는 모두 성공한 총리였다고 결론 지은 탓인지, 많은 이들이 그래도 어느 총리를 가장 좋아하는지 물었습니다.
모두 시대 상황에 맞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어 어느 한 사람을 앞세우기가 주저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 끝에 헬무트 슈미트 총리라고 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라인강 기적의 아데나워, 동방 정책의 브란트, 독일 통일의 콜도 아니고 슈미트라니, 그리고 역대 총리 가운데 유일하게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하여 쫓겨난 그 사람이라니 하는 반응이 따랐습니다. 당연히 그 이유를 궁금해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 존경할 만하고 행복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분이 슈미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시사 주간지 ‘디 자이트(Die Zeit)’의 공동 편집인으로 일하며 독일이나 세계의 문제를 분석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시민들도 그를 ‘독일의 현자’라 부르며 존경하였고 이슈가 생기면 우선 그의 견해를 듣기를 원했습니다. 줄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는 그에겐 방송 중에 흡연이 허용될 정도였습니다.
슈미트는 전임 총리인 빌리 브란트가 총리실에 숨어든 동독 간첩 때문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총리직을 승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브란트가 책임지고 퇴임할 일이 아니라며 한사코 퇴임에 반대하였습니다. 자신에게 넘어올 총리직을 밀어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참 순결한 모습입니다.
그의 집권 당시 적군파 등 테러리스트들이 주요 요인을 납치하여 구속된 테러 분자들과 교환을 요구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무고한 요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법과 타협하는 것과 국가 질서를 지키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서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1977년 10월 91명을 태운 여객기가 모가디슈로 납치되었을 때도 협상을 거부하고 특공대를 투입하여 테러 분자를 사살하고 인질들을 석방시켰습니다. 실패하는 경우 퇴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슈미트와 아내 로키는 자신들이 납치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인질 교환은 절대 하지 말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이를 연방 정부 문서실에 남겨놓았습니다.
그는 소련이 동구권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자 나토와 협력해 핵미사일을 배치, 무력의 균형을 도모하고 아울러 협상을 통하여 핵을 폐기 또는 감축하고자 하였습니다. 무력의 균형이 없는 평화는 굴종의 평화일 뿐이라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당원 및 평화 운동가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의회 불신임 결의로 총리직에서 쫓겨납니다. 그러나 슈미트의 이 ‘이중 결정’은 훗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안보의 토대가 됩니다.
슈미트와 아내는 68년을 해로하였습니다. 열 살 때 학교 친구로 처음 만났으니 알고 지낸 것은 무려 82년입니다. 이혼하거나 일찍이 사별하여 어려움을 겪었던 다른 총리들과 달리, 해로한 기간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슈미트 스스로 자신은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오만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통하는 결점이 있었지만,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아량이 넓고 마음이 따뜻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주었으며, 자신에게 쏟아진 찬사는 아내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슈미트가 한 번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는데, 이혼하자는 아내에게 슈미트는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는 슈미트의 단호함에 그를 용서했고 일생 단 한 번의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이런 사실까지도 솔직히 공개하는 슈미트. 그는 지혜와 신념의 정치인일 뿐 아니라 부부 관계가 이상적이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그를 가장 행복한 총리로 내세우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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