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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중심부에 러시아 부호들 대저택 즐비한 까닭

황태자의 사색 2022. 4. 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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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중심부에 러시아 부호들 대저택 즐비한 까닭

중앙선데이

입력 2022.04.23 00:02

업데이트 2022.04.23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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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아이 

런던 켄싱턴궁 인근에 있는 러시아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저택. [EPA=연합뉴스]

영국 왕위 계승자인 윌리엄 왕세손과 그의 일가는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하이드파크 인근 켄싱턴궁에 살고 있다. 곧 왕이 될 왕세손 가족이 살고 있는 이 특별하고 부유한 동네에는 중국의 영화감독 왕젠린, 인도 철강업계 거물 락시 미탈, 동남아 유일의 전제군주제 국가인 브루나이의 왕, 그리고 곧 프리미어리그 첼시 FC의 전 구단주가 될 러시아의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 등 전 세계 유명인사들이 살고 있다.

영국 중심부에 있는 아브라모비치의 1억2000만 파운드(약 1900억원)짜리 저택은 세계 부유층의 놀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국의 일면을 상징한다. 지난 수십년간 영국 정부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자본이 자국에 들어오는 것을 기꺼이 허용했다. 이런 자본이 지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이튼광장은 ‘모스크바 온 템스’ 별칭

이튼광장의 고급주택가엔 러시아 부호들이 많이 모여 산다. [EPA=연합뉴스]

국제투명성기구에 따르면 아브라모비치의 영국 내 총 자산은 약 2억5000만~ 3억 파운드 규모다. 하지만 이는 런던에 있는 러시아 자본의 극히 일부다. 그는 첼시 구단주가 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영국 내 다른 러시아 이민자들은 아브라모비치와 달리 대중의 눈에 띄지 않은 채 막대한 자산을 모아 왔다.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던 영국 오랜 저택과 성들은 이들에게 인기이며 여전히 비싼 값에 팔린다. 개인적으로 이는 러시아 억만장자들이 영국 역사의 일부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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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애슬론 하우스(Athlone House)는 런던 북부에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저택이다. 겉모습은 제인 오스틴 소설에나 나올 법한 시골집처럼 보이지만, 인구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런던에서 꽤나 중심부 위치해 있다.

애슬론 하우스는 1869년 산업혁명 시대 염료 제조업계의 큰손에 의해 지어졌는데, 2016년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주요 재정 지원자인 미하일 프리드만이 6500만 파운드 (약 1005억)에 구매했다. 그는 이번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연합(EU)으로부터 제재를 받았다.

방 72개가 있는 런던 외곽의 대저택 서튼 플레이스(Sutton Place)는 헨리 8세의 궁정 관리인 리처드 웨스턴이 1525년 지은 건물로 현재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과 밀접한 러시아의 억만장자 알리셰르 우스마노프가 소유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져 있는 그의 요트는 현재 EU 제재로 압수됐다.

푸틴의 주요 재정 지원자인 미하일 프리드만이 구입한 런던 애슬론 하우스. [사진 위키피디아]

런던 내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벨그라비아의 이튼광장은 ‘레드 스퀘어(Red Square)’와 ‘모스크바 온 템스(Moscow-on-Thame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근처 주민 상당수가 러시아 억만장자들이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과거 이튼광장에는 영국 유명 인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숀 코너리, 엘튼 존 등이 거주했다. 하지만 약 2000만 파운드짜리 이 아파트들은 현재 러시아 최대 그룹 중 하나인 올레그 데리파스카와 러시아 국영 가스 회사의 회장인 안드레이 곤차렌코 등 러시아 억만장자들의 집이 됐다. 아브라모비치 또한 이 광장에 위치한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런던에 러시아 억만장자들이 이렇게 많아진 건 우연이 아니다. 이들이 영국의 홍차와 해리포터를 좋아하기 때문에 영국으로 몰려온 게 아니라, 영국 정부가 그들에게 영국에 오라고 열심히 설득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다른 나라의 부유층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어떤 수상한 거래를 하는지 명확히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이 영국에 들어오도록 많은 이득을 제공했다. 이론적으로는 부유층이 많아질수록 영국 경제에 더 많은 자본을 가져올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국 국민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나이트 프랭크의  『부(富) 보고서(The Wealth Report)』(2001)에 따르면, 87만 명 이상의 백만장자가 런던에 살고 있다. 이는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많은 숫자다. 포브스 추산에 따르면 런던에 살고 있는 61명의 억만장자의 순자산 합산 금액은 2500억 파운드에 달한다. 우스마노프가 사는 런던 외곽의 서리 같은 곳까지 확장하면 런던 내 억만장자 수는 171명으로 증가한다.

이렇게 많은 부자들이 영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정부에서 제공하는 황금비자 제도 덕분이다. 공식적으로는  티어(Tier)1 투자 비자인데, 2008년부터 200만 파운드를 투자하겠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리고 그 가족에까지 즉각적인 영주권을 제공했다.

이 비자 소지자는 투자 금액에 따라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200만 파운드를 투자하면 5년 후에 영국 여권을 얻을 수 있다. 투자금을 500만 파운드로 올리면 3년만 기다리면 되고, 투자금이 1000만 파운드일 경우 2년 후에 시민권 획득이 가능하다.

프리드만, 우스마노프, 아브라모비치(왼쪽부터). [로이터·AP=연합뉴스]

영국 시민권을 얻는 게 세계 부유층에게 매력적인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영국 사회 내 상류층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영국 상류층 신사들이 트위드 정장을 입고 샴페인을 마시며 살 거라고 상상한다. 돈을 들여 영국에서 시민권을 얻으면 이런 상류층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적어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전에는 영국 여권으로 유럽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여행하고, 거주하고,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러시아나 중동의 부유층들로서는 돈을 내고 영국 여권을 구매하는 셈인데 그렇게 구매한 영국 여권으로 유럽에서 합법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브렉시트 이후에는 불가능한 일이 됐지만 말이다.

셋째, 영국의 독특한 비거주자 신분 제도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다. ‘Non-dom’이라고도 불리는 비거주자 신분은 특이한 제도다. 영국에 거주해도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어떤 식으로든 커넥션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만 있다면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이는 영국에만 있는 제도인데, 전 세계 부유층에게 영국을 정말 매력적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해외에 자신 소유의 집이 있다면 영국 시민권자라도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또 비거주자 신분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소득이나 자본 이득에 대하여 영국 정부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런던 은행원 5명 중 1명 비거주자 신분

이를 위해 비용이 들긴 하지만, 세계적인 부유층 입장에서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다. 고정 요금은 3만 파운드, 12년 이상 영국에서 산 사람의 경우 6만 파운드 정도다. 해당 비용만 내면 수백만 파운드 또는 수십억 파운드 수입에 대해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소득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해외에 자회사를 둔 다국적 회사의 경우 이 해외 자회사를 통해 소득을 올릴 수 있어서 더더욱 쉽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런던에서 일하면서 연봉 12만5000파운드 이상을 버는 은행원 5명 중 1명이 비거주자 신분을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자금을 해외 은행 계좌에 보관할 수 있으며, 해당 자금을 영국에서 소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영국 정부는 수십 년 동안 세계 부유층에게 열려 있던 국경의 문을 닫으며 억만장자 투자자들을 위한 황금비자 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나 이미 영국에 진출해 있는 수천 명의 백만장자들과 억만장자들은 그대로 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 억만장자들을 신속히 제재하려고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영국 정부는 그들을  보호해 왔다. 이미 영국 내에 자리 잡은 러시아 부유층은 부패한 정권 하에서 고통받는 많은 피해자를 만든 장본인이며, 영국 정부는 이들이 자본을 불리는 것을 합법화한 셈이다.

그리고 영국은 여전히 부유한 사람들이 영국으로 몰리는 것을 보장하는 황금 티켓인 비거주자 신분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실제로 이달 초 리시 수낙 영국 재무장관의 부인인 아크샤타 머시가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비거주자 신분을 주장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국의 세금을 담당하는 책임자의 아내가 영국 정부에 세금을 내는 걸 회피하려 이 제도를 악용했다니 이 문제에 대한 영국 정부의 태도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 유진실

짐 불리(Jim Bulley) 코리아중앙데일리 에디터 jim.bulley@joongang.co.kr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때 영국 지역 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한국에 왔고 현재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스포츠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KBS월드, TBS(교통방송), 아리랑TV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진행자 및 패널로 출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