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이 길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전력 질주 달리기도 있고, 산책도 있고, 모두가 똑같이 이인삼각처럼 발 맞춰서 가는 것도 제각기 장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각자 자신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는 게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좌파의 어떤 점이 전체주의 우려를 자아냈습니까.
“전 국민에게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을 주는 장면을 볼 때가 그랬습니다.
저처럼 당장 긴급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일괄적으로 돈을 쥐여줬죠.
그 돈은 평등에 대한 질 낮은 아첨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주체를 달리하는 정부를 열 번 이상 경험해봤는데, 아무 대가도 노력도 없이 국가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공돈’을 받는 일이 문 정부에서 제일 많았습니다.”
▷최근 김지하 등 동료 문인들의 부고가 잇달아 들려왔습니다. 생전에 왕래는 있으셨나요.
“김지하 선생과는 좋은 추억이 많습니다.
내가 대구 살 때 김 선생이 찾아와 술도 마시고 직접 난을 쳐서 일명 ‘지하난’도 선물해주셨죠.
어느 날은 진보 문인들과 술을 먹다가 시비가 붙었어요. 그때 김 선생이 ‘너네 이문열 말 잘 들어라. 쟤 말 안 듣고
느그들끼리 운동하면 망한다’ 하면서 나 대신 싸움을 붙었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요 며칠 몸이 안 좋아서 무심하게 문상도 못 간 게 계속 후회스럽습니다만….”
떠나버린 동료 문인들을 추억하듯 서재 테이블 위에는 보라색 해당화 세 송이가 유리병에 꽂혀 있었다.
이 선생의 고향인 영양에서 자라는 꽃이다. 고향에서 몇 그루 얻어다가 부악문원 뜰에 심어뒀다고 했다.
해당화가 한창일 그의 고향에는 문학관이 지어지는 중이다.
살아서 자신의 문학관을 갖는 영광을 누리는 문인은 흔치 않다.
▷영양의 문학관 건립은 어떻게 돼갑니까.
“당초 올해 6월 말쯤 문을 열 예정이었는데 좀 늦어져 아마 8~9월은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전시 공간뿐 아니라 도서관도 마련합니다.
제가 갖고 있던 책들도 있고, 우리 또래 교수들이 살림을 정리할 때 남는 책을 받아둔 것까지 해서
1만 권 정도 장서를 갖춰 손님들을 맞으려고 합니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젊어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관심 없다.
명예인들 영광인들 죽은 내게는 무슨 위로가 되겠나’ 하고 허무주의적인 답을 했었습니다.
여전히 죽은 뒤의 영광을 탐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생각하는 문학의 기능이 있을 텐데,
그 역할을 제일 잘 수행한 작가라고 정의된다면 참 좋겠지요.”
▷선생께서 생각하는 문학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작가가 가장 많이 생각하면서도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어떨 때는 허망한 유희 같기도 하고, 그래도 사람의 말이니 새가 울고 개가 짖는 것보다는 울림을 줬으면 하기도 하고…. 삶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살아 있는 내게 위로가 될 수도 있겠지요.
각자가 정의하는 문학의 기능이 무엇이든 ‘그래도 문학의 존재 의미를 보여준 작가였다’ 이렇게 기억됐으면….”
■ 이문열은…
△1948년 서울 출생, 본명 이열(李烈) △서울대 국어교육과 중퇴 △1977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입선(‘나자레를 아십니까’)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새하곡’) △1979년 오늘의 작가상(‘사람의 아들’), 1982년 동인문학상(‘금시조’), 1984년 중앙문화대상(‘영웅시대’), 1987년 이상문학상(‘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다수의 문학상 수상 △1998년~현재 부악문원 대표 △2015년 은관문화훈장 △2016~2018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