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을지문덕을 내걸어라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출장 간 외신 친구들이 ‘미션 두 가지’가 생겼다고 입을 모은다. 개회식 성화 최종 점화자였던 디니거 이라무장(21), 그리고 혼자 있는 펑솨이(36)를 인터뷰해야 한다면서 삼엄한 중국 정부 감시를 피해 눈밭을 헤치고 다닌다. 아직 성공한 친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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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니거 이라무장은 여자 크로스컨트리 선수다. 국제스키연맹(FIS) 세계 랭킹조차 알 수 없는 무명인데 4일 개회식에서 성화대 불을 밝혔다. 그는 중국 신장자치구 출신 위구르족이다. 서방세계가 신장자치구 인권 문제로 ‘외교적 보이콧’을 하자 중국은 이라무장 카드로 되받아쳤다. 나치 정권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유태계 펜싱 선수 헬레네 마이어를 출전시켜 “하일 히틀러!”를 외치게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라무장은 개회식 이튿날 여자 15km 스키애슬론에 나와 출전 선수 65명 중 43위를 했다. 경기장이 베이징에서 160km 떨어진 장자커우에 있는데, 그는 훈련 대신 리허설에 힘쓰다 행사가 다 끝난 자정에야 이동했다. 그에게 소감을 물으려고 외신들이 경기장에 몰려들자 중국 선수단은 IOC 규정도 무시하고 공식 취재 구역에 아예 안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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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숨바꼭질 촌극을 보면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을 생각한다. 시드니 올림픽 성화 최종 점화자는 호주 원주민(애버리지니) 육상 스타 캐시 프리먼이었다. 5만년 넘는 원주민 역사를 300년 전 들어온 영국인들이 인종 청소하듯 짓밟았는데 프리먼이 불을 밝히면서 호주는 새 천년의 시대를 열었다. 과거를 직시했고 참회했다. 이 대회 여자 400m 금메달을 따낸 프리먼은 호주 국기와 애버리지니 깃발을 동시에 들고 소감을 말했다. 아무도 그를 가로막지 않았다.
베이징 경기장엔 중국 테니스 선수 펑솨이도 있다. 그는 작년 11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화염으로 뛰어드는 나방이 될지라도 진실을 알리겠다”며 공산당 고위 간부에게 상습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후 보름 넘게 자취를 감췄다가 “성폭행당한 사실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로봇이 되어 돌아왔다. 중국 정부가 지금처럼 펑솨이 곁을 24시간 감시하는 한 그가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과 밥을 먹든 손뼉을 치든 진짜로 잘 지내는지 알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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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이런 나라인데 대한체육회는 웬일로 ‘부적’도 없이 베이징에 갔다. 작년 여름 도쿄 올림픽 선수촌에 ‘범 내려온다’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 같은 대형 현수막을 참가국 중 유일하게 내걸었던 까닭에 개최국 일본에 오심 피해를 안 당한 것 아닌가. 왜 빈 손으로 ‘눈 뜨고 코 베이징’에 가서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이 중국의 편파 텃세에 울고 한복과 김치도 뺏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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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빨리 현수막을 내걸기를 바란다. 중국은 ‘대국’이니 이순신 장군이나 호랑이론 역부족일 것이다. 살수대첩 을지문덕 장군의 시구가 좋겠다. 을지문덕 장군이 이 말로 수나라 군대를 물리쳤단다.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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