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실리콘밸리의 한 상점에서 맥주를 사고 신분증을 건넸다. 유심히 살펴보던 직원의 눈이 반짝였다. “썽…민? 맥주? 좋아요?”. 그는 “이름을 보고 한국인인 줄 알았다”며 “한국말을 잘하고 싶다”고 했다. 공대 출신의 투박한 엔지니어들이 가득한 실리콘밸리에서도 최근 이런 사람이 늘었다.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를 탔을 때도, 세입자를 구하는 부동산 중개인을 만났을 때도 모두 먼저 한국의 K팝, K드라마, K무비를 언급하며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이런 경험의 빈도는 최근 1년 사이 더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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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중심이 돼가는 테크 업계와 금융 산업에서도 한국 기업과 한인들의 활약이 점점 눈에 띈다. 올 1월 미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에선 한국 기업이 주인공이었다. 삼성·LG·현대차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소규모 스타트업들도 전 세계 투자자들과 미디어를 사로잡았다. 한인 1.5세들은 미국 사회의 의사, 변호사를 넘어 진짜 주류 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작년 10월엔 한국계 금융인 조셉 배(한국명 배용범)가 세계 최대 사모펀드 KKR의 공동 CEO가 됐다. 4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기업가치 2조4000억원짜리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한인 1.5세 에이프릴 고(한국명 고연진)는 세계 최연소 여성 유니콘 CEO 자리에 앉았다.
한국 문화 콘텐츠는 이제 ‘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BTS와 오징어게임이 만든 디딤돌이다. ‘유어 코리안 대드’라는 틱톡 채널에 270만명의 팔로어를 보유한 서울 태생 닉 조는 미국 알래스카 항공 TV 광고를 찍었다. 한인 3세가 심청전을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만든 짧은 영상과 노래는 폭발적 반응을 보이며 단숨에 100만명이 봤다.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캐피털 대표는 “한국인과 한국적인 것들이 점차 미 주류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이는 “국운이 들어오고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한국의 국격이 높아진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한국인 개인과 기업이 이룬 성과이지 국가 차원에서 달성한 게 아니었다. 정작 국격 높이기에 애써야 할 정치인들이 국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라를 이끌어갈 리더를 뽑는 한국 대선에 대해 서구 언론이 ‘수준 이하’로 평가한 기사를 보고 뺨이 화끈거렸다. 더타임스 일요판인 선데이타임스는 지난 13일 “이번 한국 대선은 한국 민주화 이후 35년 역사상 가장 역겨운 선거”라고 보도했다. “부패와 부정, 샤머니즘, 언론인에 대한 위협과 속임수가 선거를 집어삼키고 있다”고 했다. 이번 대선에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K컬처와 한국 기업 및 한인들의 성공이 빛을 내고 있지만 오랜 기간 곪고 있던 상처가 한꺼번에 들춰진 듯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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