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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면] 공포를 공감한다는 것

황태자의 사색 2022. 3. 1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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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면] 공포를 공감한다는 것

달리는 택시에서 뛰어내린
여대생이 차에 치여 숨졌다
그녀를 뛰어내리게 한 것은
`공포`가 아니었을까

공포는 지극히 개인적 감정
그러나 많은 이들이 느끼는
위협의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공포에 공감하여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 입력 : 2022.03.12 0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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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여대생이 달리는 택시에서 뛰어내려 뒤따라오던 차에 치여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블랙박스를 보니 택시기사가 행선지를 잘못 알아들은 점이 살펴지고, 여대생의 내려 달라는 소리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택시기사는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조사와 결론은 내려지지 않은 상태다.

깜깜한 낯선 길을 차가 달리는 동안 얼마나 초조하고 겁에 질렸으면 그랬을까. 그 공포를 떠올려보자 '공포에 질린다'는 말이 실감됐다. 달리는 택시에서 뛰어내린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여성이 의외로 많다. 분명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높은 수준의 일상적 공포를 환기시키고 있다.

데이트폭력과 스토킹, 성폭력, 길거리 희롱, 주택 무단 침입, 엿보기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여성들은 늘 생명에 대한 다양한 위협을 느끼고 자신을 방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공포를 남성들은 공감하기가 무척 어렵다. 오히려 남성들은 일부의 범죄로 마치 자신이 가해자가 된 것 같은 불편함을 먼저 느낀다. 뉴스에 등장하는 여성 피해자에게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그런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취약한 환경이나 피해자가 느꼈을 공포와 슬픔, 좌절감과 트라우마에 대한 공감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공포'라는 감정에 대해 주목해보게 됐다. 인간이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 중 확실히 공포는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그것은 주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만큼 일상적이지 않다. 나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데 추락사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무리해서 탔다가 호흡곤란이 온 적도 있다. 그때의 공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한 느낌이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아무도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 설명을 해줘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포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 된다. 우리를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일들은 주변에 널려 있다. 그런 감정은 쉽게 공유가 된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런데 함께 공포에 질린다는 말은 일상에서 쉽게 성립되기 힘들다. 전쟁이나 재난 상황이 아닌 이상.

여성들 사이에서는 공포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 쉽게 공유된다. 쉽게 전염되고 대화의 주제가 되며 공감의 매개가 된다. 예전에는 끼리끼리 속닥속닥 알아서 조심하고 당하면 슬퍼하는 식이다가, 이것이 거대한 사회적인 분노로 빌드업된 것이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의 결집이다. 이후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건강한 상식으로 자리 잡아가는 모습이었지만 이번 선거 과정에서 정치라는 광폭한 정치적 계산 속 젠더 갈라치기라는 모욕적인 표벌이 수단으로 인해 여성들은 다시 희화화되었고 자신들만의 영역으로 다시 위축되었다.

나는 내 주변의 누군가가, 그리고 사회의 대다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일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제야 좀 끔찍해졌다. 골목길을 걸어갈 때 앞의 여자가 뛰어가거나, 길거리에서 스칠 때 여성들이 과도하게 몸을 피해가면 불쾌감을 느끼곤 하던 젊은 날의 내가 생생하다. 이젠 결코 그럴 수 없다.

택시라는 교통수단은 비행기처럼 피해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이용해야 하는 가장 대중적인 탈것이다. 이걸 안전하게 만드는 게 절실해 보인다. 가령 일행 중 여성이 먼저 택시를 탈 때 남성 지인은 휴대폰으로 차량번호를 찍어두고, 여성에게 든든한 뒷배가 있다는 걸 택시기사에게 암시하기 위해 전화도 한두 번 걸어주지만 이걸로는 불충분하다. 근본적으로 여성들이 택시 타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여성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여야 할 것이다. 여성 전용 택시를 적극적으로 늘려나가는 데 국가가 책임을 보였으면 한다. 아울러 요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스토킹 범죄 가해자가 1차 가해를 했을 때 곧바로 인신을 구속하고 발찌를 채우는 등 강력한 조치를 포함하는 법의 도입이 시급히 이뤄졌으면 좋겠다. 미국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게 법률가들의 지적이다. 나는 출판인으로서 공포를 공감하는 것의 의미와 방법을 탐구하는 책들을 찾아볼 계획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