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리더의 소통] 경영자 괴테 "재능있는 인재에게 문호를 개방하라"

황태자의 사색 2022. 4. 2. 10:47
728x90

[리더의 소통] 경영자 괴테 "재능있는 인재에게 문호를 개방하라"

행정가로서도 수완 보여
바이마르 경영 맡아 성과 내
그를 믿어준 아우구스트 공작
`임파워먼트`의 성공 사례

  • 입력 : 2022.04.02 00:04:01
  •  0
 
경영자 괴테? 작가 괴테는 알아도 경영자 괴테, 행정가 괴테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럽대륙에 이름을 날렸던 젊은 괴테는 1775년 11월 7일 바이마르에 도착한다. 이제 막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 군주의 자리에 오른 아우구스트 공작의 초빙을 받은 것이다. 수도라지만 인구는 6000명 남짓했으며 거리에는 돼지와 닭이 활보하던 가난하고 매우 작은 나라였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표현처럼 괴테는 '어깨에서 발바닥까지 천재'였던 것일까. 이때부터 괴테는 행정가이자 경영자로서 또 다른 능력을 발휘한다.

젊은 군주의 절대적 신뢰 아래 그는 내각의 수반인 추밀고문관 등의 정무 직책을 수행한다. 국가재정, 전쟁, 도로 건설, 광업, 궁정 오페라, 축제까지 다 관장하고 있었다.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 궁정극장의 극장장이자 감독으로서 경영과 연출도 총괄했다. 수많은 매력적인 배우와 가수가 그의 권한과 명성을 노리고 의도적인 접근을 했지만, 괴테는 정중히 물리쳤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기관의 장으로 있는 것이며, 그 기관의 발전은 내 자신의 순간적인 행복보다 한층 중요했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가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공적 책임감을 강조하는 말이며, 요즘으로 치면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와 비슷한 발상이다. 괴테는 후대의 경영자들이 경청할 만한 혁신적 사고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극장의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아 돈을 아낀다는 핑계로 능력 있는 배우 대신 저렴한 배우를 쓰자는 의견을 일축한다. 재정에 본질적인 도움이 안 되는 미봉책이라는 생각에서다. "오히려 저녁마다 극장 좌석이 꽉 차도록 할 방도를 궁리해야 한다."

대안으로 주연급 젊은 남자 배우와 뛰어난 재능과 미모를 갖춘 여성 배우를 기용하고, 일요일에도 공연해 수입을 늘리자는 공격적 발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이마르에서 일요일에는 극장 문을 닫았기에 주민들의 낙이라고는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경영자 괴테는 연공서열로 승진하는 제도에도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채용과 인사에 관해 자주 인용한 것은 나폴레옹의 금언이었다. "재능 있는 인재에게 문호를 개방하라!"

군주는 현대의 기업으로 하면 오너 회장, 괴테는 경영자였다. 오너가 권한과 책임을 과감히 부여하는 임파워먼트로 경영자의 기를 살려주었다. 괴테는 열정적으로 일하며 성과를 냈다. 아우구스트 공작은 바이마르에 '자유 미술학교'를 설립해 남녀 관계없이 만 12세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문을 개방하였다. 예나대학을 창립해 당시 독일어권에서 가장 혁신적인 대학으로 키웠으며 1816년에는 독일 최초로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의 뒤에 괴테의 조언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바이마르 생활이 10년 정도 지났을 때 괴테는 이탈리아로 훌쩍 떠난다. 번아웃 증상 때문에 무려 1년9개월이나 자리를 비운다.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괴테의 일탈이었지만 군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고 긴 휴가기간의 급료를 꼬박꼬박 챙겨주었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떠 연봉을 인상해주기까지 했다. 그 마음에 감동한 괴테는 죽을 때까지 아우구스트 공작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처음 바이마르에 왔을 때만 해도 괴테는 스물여섯 살, 군주는 열여덟 살이어서 애송이들의 장난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주변의 걱정과 비웃음을 뒤로하고 바이마르의 문예 부흥이라는 기적을 일으킨다. 유럽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바이마르는 천재들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는다. 세상의 1인자와 2인자의 관계는 대부분 아름답지 않게 끝나지만, 이들의 관계는 해피엔딩이었다.

[손관승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