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얽히고설킨 친족살해 재판
엄청난 가문에서 벌어진 친족 살해 재판이었다. 피고 오레스테스는 트로이아 원정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아들이었고, 그의 죄목은 모친 살해였다. 명백한 범죄였다. 그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의 목을 잘랐다. ‘모친살해범이니 돌로 쳐 죽여야지. 신들까지 끼어들 일이었나?’ 누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사건이 단순하지 않다. 오레스테스의 모친 살해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였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은 10년 전쟁을 치르고 귀향했지만, 단 하루도 승리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자줏빛 융단을 밟고 들어선 왕궁의 욕실에서 그는 도살장의 소처럼 도륙당했다. 그를 죽인 것은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였다. 그 뒤 오레스테스와 그의 누이들도 내쫓기거나 억류됐다. 모친 살해는 오랜 추방 끝에 고향에 잠입한 아들이 벌인 거사였다. ‘그럼 클리템네스트라가 먼저 잘못했네.’ 누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들의 팽팽한 유무죄 공방
대단한 가문의 얽히고설킨 복수 사건이니 신들이 재판에 참여해도 이상하지 않다. 오레스테스는 유죄인가? 이것이 재판의 핵심 사안이다. 검사 측에는 ‘복수의 여신들’이 있다. 이들은 모친 살해를 이유로 오레스테스를 단죄한다. 변호인 측에는 제우스의 질서를 대변하는 아폴론이 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임을 이유로 들어 모친 살해범을 변호한다. 어머니 편과 아버지 편이 맞서면서 오레스테스 재판은 성(性) 대결의 양상을 띤다. 신들의 세대 갈등까지 겹치면서 재판은 더더욱 복잡해진다. 구세대에 속한 복수의 여신들은 친족관계의 수호자로 나서고, 신세대의 신 아폴론은 계약으로 맺은 혼인의 신성함을 대변한다. 어느 쪽이 옳은가?
재판은 지혜의 여신 아테네가 맡았다. 아테네는 어머니 없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왔지만 여신이니까 재판의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을까? 아테네의 재판하는 모습이 정말 지혜의 여신답다. 혼자의 판결이 어리석은 짓임을 잘 아는 여신은 시민 11명을 배심원으로 뽑는다. 재판 규칙도 미리 정한다. ‘다수결로 결정하되 가부동수일 경우 오레스테스를 무죄로 한다.’ 드디어 아테네와 11명의 배심원이 오레스테스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 왔다.
아테네의 논리는 어딘지 모르게 궁색하지만, 판결 뒤의 처신은 매우 현명했다. 재판 결과에 복수의 여신들이 분노하고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 “독을 내 심장에서 뿜어내 되갚아 주리라!” 독기를 뿜어 들판의 곡식과 인간의 씨를 말리겠다고 여신들이 펄펄 뛴다. 아테네 여신의 간곡한 설득이 없었다면, 아마 그렇게 됐을 것이다. ‘절반의 시민이 당신들 편이 아닌가!’ 아테네가 다독인다. 여신의 설득은 단호하면서도 유연하다. 번개가 숨겨진 창고 열쇠를 알고 있다는 은근한 위협과 분노를 자비로 바꾸면 시민들의 공경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에 분노의 여신들이 물러선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여신들은 양보의 대가로 지하에 거주지를 배당받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그렇게 땅속에 묻혔다.
문명의 질서가 남긴 것은…

복수의 여신들이 머문 지하의 거처는 어디일까? 굳이 찾아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 곳은 우리가 속한 세상 곳곳에 널려 있으니까. 문명의 밑바닥에는 ‘분노의 여신들의 목소리’가 묻혀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문명’의 이름으로, ‘법’의 이름으로. ‘편리’의 이름으로, ‘정상’의 이름으로 무시되어 묻혀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문명’이 그렇게 묻혀버린 것들의 억압 위에 세워져 있음을 인정하기란 불편할 수 있다. 이 불편함을 일컬어 프로이트는 ‘문명의 불편함(das Unbehagen in der Kultur)’이라고 불렀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사라질 불편함이 아니다. 우리에게 최선은 이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아테네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 묻혀버린 목소리들을 공경하자. 공경의 마음이 포용의 길을 연다. ‘정의’, ‘정상’, ‘편리’를 내세워 아무데나 ‘불법’, ‘비정상’, ‘불편’의 딱지를 붙이면 그동안 묻혀 있던 분노와 저주까지 터져 나올 수 있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