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재훈의 실리콘밸리 인사이더] 우크라, 매년 IT 인재 13만명 배출… 테크업계도 비상
필자가 25년째 살고 있는 실리콘밸리는 ‘올림픽 선수촌’을 연상케 한다. 세계 각국 출신 동료, 이웃이 생기기 때문이다. 같은 골프 클럽 멤버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독일 보슈(Bosch)사 투자 대표이고, 앞집 살았던 동네 포커 모임 멤버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아마존웹서비스(AWS) 임원이다. 또 한국·미국 스타트업에 엔젤 투자를 함께해온 이는 이스라엘 출신 창업가다. 이렇게 배경이 다양한 실리콘밸리에도 최근 전쟁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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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IBM, 보잉 등 많은 테크 기업은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연구 개발(R&D)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구소련 시절부터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덕분에, 뛰어난 코딩 실력과 원어민급 영어 실력을 갖춘 인재가 많기 때문이다. 매년 우크라이나에서 배출되는 엔지니어는 13만명 이상으로 같은 유럽권 국가인 영국, 폴란드의 2배 이상이다. 피치북(Pitchbook)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스타트업 126곳이 우크라이나에 직원을 두고 있고 현지 IT 업체에 개발 외주를 맡긴 업체는 수천 곳이다.
우크라이나 출신 스타트업 창업자도 많다. 메타(구 페이스북)에 160억달러 가치로 인수된 메신저 와츠앱(WhatsApp), 150억달러 가치로 나스닥에 상장한 소프트웨어 개발자 플랫폼 깃랩(Gitlab), 130억달러 가치로 자금을 유치한 온라인 영문법 서비스 그래머리(Grammarly)의 창업자가 모두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스타트업으로 꼽히는 눔(Noom)도, 정세주 대표와 공동 창업한 아텀 페타코프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필자도 우크라이나와 많은 인연이 있다. 작년 9월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워싱턴DC에서 회담한 후, 실리콘밸리를 방문한 자리에 창업·투자가 수십 명과 함께 초대받은 것이다. 연기자 출신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당일 청중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지금도 대통령직을 연기 중이니 본국 사람들에겐 1급 비밀로 해달라”는 농담을 던져, 딱딱했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경제 부처 장관, 우크라이나의 주요 IT 기업, 스타트업 대표들과 동행한 대통령이 발로 뛰는 모습을 보며 감탄과 부러움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최근 필자는 샌프란시스코 우크라이나 영사관 초청을 받아 ‘우크라이나 출신 스타트업 데모데이’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행사에 앞서 주최 측에서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해 1분간 묵념을 요청했는데, 청중 100여 명이 일순 조용해졌고 필자도 숙연해졌다.
현재 실리콘밸리에선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한 움직임이 다각도로 진행 중이다. 자선 단체들의 성금 모금뿐 아니라, 많은 테크기업이 우크라이나 개발자에게 원격으로 일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리모트 우크라이나(Remote Ukraine)’란 웹사이트에 구인·구직 광고를 내고 있다.
반면 러시아 출신 벤처 투자사는 최근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경제 제재가 강화되면서, 종전의 ‘러시아 블랙리스트’가 더욱 확대됐고 이에 따라 해당 자본을 출자받은 벤처 투자사와 스타트업이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다. 수년 전 트럼프 정부 당시, 중국계 자본이 실리콘밸리에서 퇴출되다시피 했던 기억을 생생하게 갖고 있는 스타트업들은 ‘러시아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젠 스타트업들도 벤처 투자를 받을 때, 투자가의 자본 출처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됐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란 조직을 두고,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해외 투자가들의 인수나 투자 건을 심의하고 있다. 예전엔 주로 인수를 심의했는데, 2018년부터는 소액 지분 투자라도 국익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프라, 기술, 데이터 분야는 심의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 중국계, 러시아계 자본이 이런 첨단 기술을 손에 넣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 스타트업들도 글로벌 환경 변화에 따른 리스크 관리가 중요해졌다. 특히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디지털 헬스, 로보틱스, 자율 주행 등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분야는 모두 CFIUS 심의 대상이다. 앞으로 자국 중심주의가 더 강화될 경우, 해외 스타트업들이 상대적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본사를 미국으로 바꾸는 현지 기업화 전략 등 슬기롭고 유연한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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