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앤 피터슨의 '요즘 애들'이란 책을 읽다가 그 책에 소개된 번아웃에 내 삶이 포개진다는 걸 알게 됐다.
평소 무기력함과 의욕 부진이 약한 우울증이 아닐까 짐작했는데, 번아웃이었다니. 워낙 이 단어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워커홀릭(workaholic)들이 겪는 일시적 증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몸속 에너지가 다 타버리는 번아웃이 오면
그게 몇 년이고 갈 수 있다는 걸 저자는 말해주고 있었다.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영상만 틀어놓고 있다가 배가 고프면 뭔가를 먹고 유령처럼 방안을 돌면서 걷다가
뱃구레가 좀 꺼지면 자리에 누워 영상을 보다가 잔다.
책은 대체로 읽기 싫다. 영상도 한 가지 종류만 본다. 한동안 우주였다가, 애기들이었다가, 요즘은 또 범죄분석 영상이다.
마음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받아들일 상태가 안 돼 한쪽으로만 길을 내는 것 같다.
그 길을 반복해서 걷다보면 인생이 황폐해짐을 느낀다.
회사 업무도 발작적 호기심은 생기지만 뒷심 부족으로 골인한다.
마무리되지 않고 책상에 쌓이는 교정지가 늘고 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그럴 줄 알았다면서 쯧쯧 혀를 차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잔소리하던 그들에게 항복하고 내 삶을 재정비할 때다.
번아웃의 원인은 성마른 욕망과 조급함, 몸을 혹사시키는 환경에 있다.
내가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책임감, 근거 없는 자신감, 목표 미달, 바닥에서 헤매는 자존감의 악순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어차피 그걸로 문제 해결은 되지 않는다. 목표라는 단어, 이제 좀 지겹다. 꽉 조여 있는 이 상태가 숨 막힌다.
나에게 귀속되는 여러 업무, 이제 누군가와 좀 나눴으면 좋겠다. 아니,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가져가줬으면 좋겠다.
직원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지난 10년간 꾸준히 사람이 그만두고 다시 들어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올해 초엔 9년 차 직원이 그만뒀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슷한 환경 속에서 아마 그도 번아웃이 왔을 것이다. 다른 직원들도 비슷하게 번아웃 증상을 겪는 것 같다.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이 번아웃이라고 한다. '요즘 애들' 속에 그 현상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다.
인생은 누가 대신 주워 담아줄 수 없는 법이니 방법을 찾아서 시도하는 중이다. 우선 사람을 많이 뽑았다. 편집부 6명 체제로 근 몇 년을 버텨왔는데 이제 8명 체제가 됐다. 그 상태에서 편집을 외주로 돌리는 비율을 대폭 늘렸다. 여기에 더해 출간 종수를 줄였다. 삼중으로 일을 덜었으니 1인당 돌아가는 편집 압력이 두 배 이상은 줄어드는 셈이 된다. 대신 기획 비중을 높였다. 기획을 하려면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녀야 한다. 책상머리 기획은 금방 시들기 때문이다. 영지버섯이라도 하나 캐오려면 산을 제대로 타야 한다. 구성원들이 기획에 힘을 쏟을 수 있게 한 달에 하루는 자기가 원하는 날 '기획데이'를 쓰기로 했다. 출근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날이다. 부드러워야 다른 게 스밀 수 있으니. 기획이 짐과 부담으로 형질전환 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생각해보면 어떤 책을 낼까 궁리하는 일은 출판의 가장 즐거운 일이다. 이 일이 즐거워야 독자들도 읽을 게 풍성해진다. 아무튼 기획이 즐거울 수 있게 수위를 잘 살펴야 한다. 구성원들 각각이 기획의 파토스로 적절히 차오르면 번아웃된 이 조직에도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날 수 있겠지.
요약하면 내가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길은 댐의 물이 넘치는지 아닌지를 잘 살피는 관찰자 역할을 하는 데 있는 듯하다. 다른 말로는 원맨쇼 리더십이 아니라 조력의 리더십으로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객이 줄어들 땐 원맨쇼 극장은 막을 내려야 한다. 이젠 독백을 마무리하고 집단 상황극을 펼칠 시점이다. 떠오르는 주연을 보고 감탄해야 할 시점이다. 무대 뒤에서 의상과 조명, 타임테이블을 잘 챙기는 사람도 필요하고, 관객 입장에서 모든 걸 생각하고 바라보는 일도 필요하다. 당분간 그 언저리를 부지런히 걸어 다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