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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수백만 호를 뚝딱 짓겠다는 정치인들에게

황태자의 사색 2022. 2. 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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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수백만 호를 뚝딱 짓겠다는 정치인들에게

중앙일보

입력 2022.02.11 00:38

지면보기지면 정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이 가요에 등장하는 이쁜이와 금순이는 서울로 가겠다고 단봇짐을 싸서 나섰다. 요즘이면 연예기획사 연습생 지원을 의심해보겠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은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이 막 개국한 시점이었다. 당시 전국의 TV 보급은 고작 300대 언저리였다. 이쁜이는 TV가 아닌 우물가 수다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서울 가면 취업해서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당시 매혈인(賣血人)으로 가장 많은 것은 무작정 상경자들이라는 게 신문보도 증언이다. 피를 팔든 품팔이를 하든 마련한 푼돈을 교두보로 이들은 서울에서 생존해나갔다. 그 절박한 생존력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서울의 노동력 집중은 산업화의 원동력이면서 결과물이었다.

40년간 1000만명 증가한 서울 인구
아파트값 상승 요인은 투자 가수요
투자재 넘어 지위재로 변한 아파트
허황된 공약으로 도박판 된 정치판

그 이쁜이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전쟁으로 잠시 주춤했어도 상경바람은 광복 직후 바로 시작되었다. 1951년 65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쉼 없이 늘다가 1992년 1097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40년간 1000만 명이 늘었으니 연평균 25만 명 정도다. 목포나 경주 크기의 도시 도합 40개가 말끔히 사라져 서울에 흡수되었다는 이야기다. 서울은 그간 행정구역도 대폭 넓어졌다. 그래서 서울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거대한 신도시에 가깝다. 워낙 넓은 면적이고 계획·비계획 지역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1992년 이후 서울 인구는 늘지 않았으나 대신 인근 수도권 인구는 계속 증가했다.

노익장들이 아니라 청춘남녀들이 주로 상경했으니 수도권과 지방의 인적경쟁력 격차는 인구지표의 숫자보다 훨씬 컸다. 농촌인구의 도시노동력 전환은 전 세계 산업화의 공통 현상이다. 만성적 주거부족도 경쟁력 있는 세계 대도시의 일반적 문제다. 그러나 한국은 그 전환 속도가 남달랐다. 아무리 궤짝 같은 아파트를 찍어내며 지어도 서울로 밀려드는 인구 수용은 불가능했다. 부작용은 가끔 붕괴로 모습을 드러냈다. 1970년은 유독 기록적인 해였는데 그해 서울시 인구는 물경 66만 명이 늘었다. 그리고 그해에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의 값은 오르기 시작했다. 이쁜이가 공단 벌집방을 전전할 때 복부인들은 아파트를 사고팔았고 고위층은 특혜분양을 받았다.

그런데 인구증가가 멈췄다는 지금도 여전히 아파트값이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값이 더 오르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런 기대가 투자재로서의 아파트 수요를 재생산하니 그건 가수요라 부를 것이다. 가수요가 비대한 시장은 투기장이라 부른다. 투기장의 경쟁력은 쥔 판돈의 크기다. 서울 아파트 공급의 문제는 신규 공급분이 무주택자가 아니라 더 큰 판돈의 다주택 소유자에게 빨려간다는 데 있다. 다주택 소유자가 자산을 늘려가면서 진입장벽은 점점 높아진다. 그래서 아파트는 이제 투자재를 넘어 계층차별의 지위재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앵두나무 늘어선 시골 논밭 사이라도 아파트에 살아야 성공 인생이라는 ‘아파트 계급사회’에 이르렀다. 개천에서 용 나야 한다는 게 산업화 한국의 가치관이었다. 그런데 아파트가 개천도 우물도 덮기 시작했다는 게 지금 상황이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 안정 대안은 인구 분산에 의한 수요억제, 혹은 충분한 공급확보다. 인구 분산은 방법과 효과가 불투명한 장기사업이다. 결국 넘치고 남을 만큼 충분한 공급 신호 없이 가수요는 줄지 않을 것이다. 분명 확실한 공급 신호는 필요하다. 그래서 과연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이 앞다투어 주택공급 공약을 내걸었다. 모두 단위가 수백만 호다.

이쁜이들 상경의 산업화 기간에 한국 대통령은 사단장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국민의 진군 방향을 넘어 점령할 고지도 고지했다. 1인당 1000달러 소득, 100억달러 수출. 사단장이 고지를 정하면 결국 병사들이 기어올라야 한다. 그러나 수출목표 달성 기념 대대장·중대장 포상의 순간에도 공장노동자 이쁜이는 여전히 미싱에 인생을 박음질하고 있었을 게다. 주택 200만 호 건설 공약도 있었다. 건설회사 사장 출신 대통령은 덩달아 7% 경제성장률, 1인 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의 선진국가 진입이라는 747공약을 내걸었다. 세계 7위의 기준이 뭔지는 모를 일이었다. 숫자는 현실을 치환하는 순간 폭력이 된다. 사회가 숫자로 된 지향점을 갖는 순간 이쁜이들의 인생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지도자는 장군, 사장과 다르니 달성할 숫자의 제시자가 아니라 공유할 가치의 제안자여야 한다.

부풀린 숫자로 주변을 현혹하는 것은 투전판 전략이다. 인구분포와 건설시장 규모로 볼 때 수백만 호 주택공급 공약은 우리 정치판이 도박판과 유사하다는 불행한 자백이다. 정치인들이 건설 목표를 숫자로 써붙이면 국토는 속도전의 전투장이 되고 궤짝아파트가 산포된다. 광주의 아파트가 공사 중 무너졌고 건설노동자들이 죽었다. 사고 원인은 결국 돈과 시간으로 수렴될 것이다. 이들은 숫자로 치환되는 폭력적 지배 변수들이다. 붕괴하는 아파트 모습이 끔찍하다면 무책임한 숫자의 건설 공약은 내지 말아야 한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