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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병가 [중앙일보]

황태자의 사색 2006. 8. 21.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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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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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에서 병가(兵家)는 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일컬었다.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자(孫子)가 대표적인 인물이고 오자(吳子) 등이 그 뒤를 따른다.

이들은 사람과 사람, 부족과 부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에서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느냐에 골몰한다. 하지만 서양의 고대 군사학이 대개 진법(陣法) 등 싸움의 기술만을 언급하는 데 그치는 것에 비해 동양의 병가는 이를 철학으로 승화시킨다.

군사력의 운용을 '흐르는 물'과 같이 해야 한다고 설파한 손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찬 데서 빈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의 이치처럼 자연의 조건, 사람들이 놓인 상황에 맞게 병력을 운용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손자는 또 정규 병력(正)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비정규 병력(奇)의 운용을 병치해 균형성을 확보한다. 이를테면 하늘과 땅, 밝음과 어두움의 음양(陰陽)적 사고를 병법에 투영하는 철학과 사상의 차원이다.

흔히 병가를 노자와 장자 계통의 도가(道家) 철학 계승자로 보는 이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람의 역사가 생성되면서 함께 시작된 기나긴 싸움의 기록과 병가는 맥을 같이 한다는 게 다른 한쪽 사람들의 주장이다.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승리를 추구하는 병가의 사상이 함께 탄생했다는 얘기다.

중국 고대의 병가가 싸움을 사상의 차원으로까지 성숙시켰지만 그저 싸움에서의 승리만을 노리는 경우도 많다. 한비자(韓非子)에는 "싸움에 임해서는 속임수를 꺼리지 않는다(兵不厭詐)"는 말이 나온다. 싸움터라는 '현실'에서 오로지 그 최고 가치인 승리만을 추구한다는 얘긴데, 철학과 사상으로서의 병가가 강한 현실성에 안주하는 대목이다.

한국 정치판의 싸움터가 '이전투구(泥田鬪狗)' 형태로 번져가고 있다. 야당 대선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하기 위한 후보자 사이의 싸움이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번져가면서 점차 뜨거워진다. 내부적으로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하는 절차와 룰이 마련돼 있을 법한데 모두 이를 무시하고 쉽게 카메라 앞에 나선다.

서로를 치고받는 모습이 2000여 년 전 만들어진 병가 언저리에 못 미친다. 철학과 사상은커녕 싸움판에서 최소한 지켜져야 할 양식(良識)마저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수준이 '속임수를 꺼리지 않는다'는 낮은 차원의 현실적 병가를 넘어서지도 못한다. 싸움의 기술이 고작 '폭로'와 '반박'에 불과하기 때문에.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2007.02.21 20:30 입력 / 2007.02.21 20:31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