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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퍼스펙티브] "개가 주인 물었다, 검찰개혁은 자살했다"

황태자의 사색 2020. 8. 1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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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퍼스펙티브] "개가 주인 물었다, 검찰개혁은 자살했다"

[중앙일보] 입력 2020.08.19 00:40 수정 2020.08.19 08:33 |

정의인가 원한인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법무연수원에서 벌어진 검사장 폭행 사태는 ‘검찰개혁’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고작 ‘강요 미수’에 장관의 수사지휘권이 발동됐다. 수사심의위의 권고는 무시됐다. 영장 집행에 폭력이 동원되고, 압수수색은 불법 감청의 소지를 남겼다. 사실을 호도하기 위해 가해자가 병원에 입원하는 코미디까지 연출됐다. 이 사건으로 이른바 정권의 “민주적 통제”를 받는 검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검찰 정의 실현이라는 목표 실종
허수아비 윤석열 만드는 작업 전락

검찰보다 비대한 게 대통령 권력
이제 검찰총장 권한까지 갖게돼

개혁엔 자기희생 따르는데 …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MBC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51.5%가 검찰개혁이 잘못됐다고 대답했다. 잘되고 있다는 대답은 41.4%에 불과했다. 여론조사기관 공동 조사에서는 국민의 52%가 개혁이 검찰 길들이기로 변질됐다고 대답했다. 개혁이 취지에 맞게 진행되고 있다는 응답은 고작 32%에 머물렀다. 지금 ‘검찰개혁’은 총장을 허수아비 만드는 작업으로 전락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개혁에는 자기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발전을 가져온다고 믿습니다.” 문재인 정권에는 이 희생의 의지가 없었다. 고작 의회 1당이 되겠다고 위성정당을 만들어 자기들이 도입한 선거제를 스스로 무력화시킨 게 그들이다. 정치개혁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검찰개혁 역시 막장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입구에 검찰 로고가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개혁에 성공하려면 자기를 내려놔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을 인정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검찰을 비난한 조국 전 장관의 처신은 현명하지 못했다. 전 정권의 적폐를 파헤치던 칼의 날카로움을 평가했다면, 그 칼이 자신을 향한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때 군말 없이 수사에 협조했더라면 지금쯤 자신이 목하 가짜로 연기하는 그것, 즉 ‘검찰개혁의 희생양’이 진짜로 돼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 최고위원 후보가 윤석열 총장을 가리켜 “개가 주인을 무는 꼴”이라고 했다. 검찰의 주인이 국민이 아니라 정권이라는 것이다. 이 거침없는 발언에서 우리는 국민이 바라는 개혁과 정권이 하려는 개혁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들은 검찰에 대놓고 권력에 충성하는 ‘개’가 되라고 요구한다. 자기들이 표방해 온 명분을 스스로 내버린 것이다. 개혁은 자살했다.

이성윤은 개혁당한 검찰의 미래

지난달 29일 한동훈 검사장과 검찰 초유의 ‘육탄전’을 벌인 정진웅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 모습. 이 장면을 찍어 배포한 사진이 검찰 직원의 부탁으로 직원 휴대전화를 건네받은 간호사가 촬영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진 촬영 및 배포 과정에서의 검찰 ‘윗선’의 지시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사진 서울중앙지검]

서울중앙지검은 ‘개혁’ 당한 검찰의 미래를 보여준다. 정권의 하명수사, 정치권과 유착, 불법적인 압수수색, 수사심의위 권고 무시, 폭력적인 영장 집행, 위험한 감청 시도, 공영방송들과의 검은 유착, ‘뎅기열’이라 놀림 받은 입원 코미디 등. 자기들이 ‘개혁’의 이유로 들었던 검찰의 부정적인 상을 총망라했다. 주인을 물지 않도록 ‘개혁’ 당한 검찰은 주인이 찍어 준 정적을 물어뜯는 개로 변했다.

누구를 위한 개혁일까? 사실 검찰개혁은 서민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서민의 인권 침해는 주로 경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약촌오거리 사건, 삼례 나라슈퍼 사건, 화성 8차 사건 등 죄없는 이들에게 살인범 누명을 씌운 것은 경찰의 강압수사였다. 반면 개혁론자들이 과도한 검찰권의 희생자로 꼽는 것은 노무현·곽노현·김상곤·한명숙·정연주·조국 등, 주로 파워 엘리트들이다.

검찰개혁은 처음부터 이들 범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활용해 슬쩍 대중을 위한 개혁으로 포장한 것뿐이다. ‘노 대통령이 개혁을 거부하는 검찰의 보복으로 희생됐다’. 대중에게 회자되는 이 ‘이야기’가 엘리트 계층을 위한 개혁을 일반 민중의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개혁이 이상한 데로 간 것은 거기에 이들 파워엘리트들의 사적 원한과 공포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방법도 무례하기 짝이 없다. 검찰이 “개혁의 주체”라는 대통령의 말은 빈말이었다. 정권은 처음부터 검찰을 ‘개혁의 대상’으로 찍어놓고 있었다. ‘개혁을 검찰의 자율에 맡겨놓은 게 노 대통령의 실책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인식이다. 최강욱 의원은 검찰개혁은 “일단 꿇으라고 한 다음에” 하라고 권한다. 그에게 검찰은 조폭일 뿐이다. “조폭들은 토론을 하고 설득한다고 교화가 되는 게 아니다.”

원한 해소라는 감정적 동기만 남아

정권이 원하는 검찰개혁과 국민이 바라는 검찰개혁 사이에는 애초에 큰 괴리가 있었다. 국민이 원한 것은 ‘정의’로서 검찰개혁. 시민들은 검찰이 이쪽저쪽 가리지 않는 공정한 칼이기를 원한다. 반면 정권이 추진하는 것은 ‘원한’으로서 검찰개혁. 우리 보스를 살해한 “조폭”은 해산시켜야지 독립성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엇갈리는 이 두 시각이 정면으로 충돌한 게 조국 사태다.

대통령은 총장에게 “산 권력에도 칼을 대라”고 했다. 이 말이 빈말이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찰이 조국 일가에 칼을 대자 정권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며 수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나섰다. 공정과 정의는 애초에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국민은 정권의 이런 행태가 검찰개혁의 요체인 ‘정의’를 파괴한다고 느꼈다. 이 느낌은 국정 지지율의 급락으로 표현됐다.

검찰개혁에서 ‘정의’라는 합리적 목표는 사라지고 ‘원한’이라는 감정적 동기만 남았다. 개혁의 시나리오 역시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보다는 검찰의 독립성을 파괴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 결과 고위공직자 수사는 공수처로 돌아가고, 그 밖의 수사들은 경찰로 넘어갔다. 총장의 지휘권은 박탈됐다. 이 과정에서 그로 인해 발생할 여러 문제점은 전혀 고려되지도, 대비되지도 않았다.

공수처도 검찰과 똑같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다. 처장으로 어떤 부류가 올지도 빤하다. 권력이 검찰과 하던 유착을 왜 공수처와는 할 수 없다는 것일까? 법무부의 “민주적 통제”를 받는 이성윤의 서울중앙지검은 공수처의 미래를 보여준다. 검찰개혁의 사도 최강욱 의원은 공공연히 윤 총장을 “공수처 1호 대상”으로 꼽았다. 공수처의 진짜 용도가 무엇인지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세상에 착한 권력 따윈 없다

개혁이 산으로 가자 어용으로 전락한 참여연대마저 성명을 냈다. “(개혁의) 핵심은 민주적 통제를 받는 수사지휘권과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인 검찰의 공정한 수사다.” 경실련에선 개혁의 주종(主從)이 전도됐다고 비판했다. “검찰개혁의 본질은 검찰이 ‘정치의 시녀’가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고, 검찰권 오·남용의 방지는 그 다음 과제다.” ‘정의’로운 검찰의 전제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이라는 지적이다.

2011년 어느 토크쇼에서 조국 교수는 검찰개혁의 첫째 조건으로 “검찰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정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장치가 고작 정권의 주관적 ‘선의’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의를 확신할 거다. 천진한 환상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이성윤 서울지검장을 이용하는 것을 보라. 세상에 착한 권력은 없다. 그래서 독립성에는 객관적 담보가 필요하다.

그 담보 중 하나가 외압을 막아주는 검찰총장의 권한이다. 그런데 정권에서는 총장의 수사지휘권을 폐지하고 이를 고검장들에게 나눠주려 한다. 이 경우 고검장들은 물론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받게 된다. 고작 ‘강요 미수’ 사건에 발동된 장관의 수사지휘권이니 그보다 큰일에는 더 헤프게 발동될 것이다. 그러니 서울중앙지검에서 벌어진 일이 머잖아 검찰의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검찰권이 비대하다 하나 그 이상으로 비대한 것이 대통령 권력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라 불릴 정도로 한국의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그 제왕이 이제 검찰총장의 권한까지 갖게 된 것이다. 총장 권한을 공수처·법무부·경찰로 분산시킨다고 하나 어차피 세 기관 모두 대통령의 “수명자”일 뿐이다. 결국 권력을 분산시킨다며 쪼갠 권한을 다시 제왕에게 모아준 꼴이 됐다.

노무현이 외친 그 검찰개혁이 아니다

동상이몽이라던가. ‘검찰개혁’을 소재로 시민과 정권이 각자 다른 꿈을 꾸었던 셈이다. 시민들이 생각하는 개혁은 검찰이 네 편 내 편 가리지 않는 정의로운 칼이 되는 것이다. 칼질을 절제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반면 정권이 생각하는 개혁은 검찰이 아예 칼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의 목적은 정의를 파괴하더라도 이른바 “민주적 통제”로 “검찰의 자기 권력화”를 막는 데에 있다.

 


왜 그럴까? 노 전 대통령 죽음의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즉 MB는 적당히 망신만 주는 선에서 수사를 끝내라고 했으나 검찰이 말을 안 듣고 전직 대통령을 구속해 처벌하려 했다고 보는 것일 거다. 그런 인식을 가졌기에 “검찰의 자기 권력화”를 해체하는 일이 공정과 정의의 원칙을 무너뜨리면서까지도 완수할 가치가 있는 개혁과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리라.

어쩌면 이마저 정치적 알리바이일지 모른다. 그들이 권력에서 독립한 검찰 앞에 저토록 공포와 적의를 드러내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은 차치하고라도 VIK, 신라젠, 라임펀드, 옵티머스 등 금융비리에 관한 보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친노친문 정치인들의 이름이다. 이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의 소리 없는 해체다.

여당의 정치인들은 지금까지 노무현의 죽음을 정치적 알리바이로 활용해 왔다. 그의 죽음을 내세워 검찰을 싸잡아 악마화하고, 그 악의 희생자를 연기해 자신들의 비리를 겨냥한 검찰의 칼을 무력화해 왔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개혁’이다. 그들이 하는 ‘검찰개혁’은 노무현이 하려던 그 ‘검찰개혁’이 아니다. 우리가 속은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출처: 중앙일보] [진중권 퍼스펙티브] "개가 주인 물었다, 검찰개혁은 자살했다"